외국 관광 후기모음

(2018. 10. 27 ~ 11. 5) 첫 유럽여행 - 서유럽 4개국 8박 10일

달리는 흑토마 2018. 11. 27. 21:53

               첫 유럽여행 - 서유럽 4개국 810

                                                                                                      조 황 래

지난 6월에 호주, 뉴질랜드 다녀오고 4달이 지났구나. 슬슬 허파에 바람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증세가 나타나면 이번에는 어디를 갔다 오지?’ 하면서 다음 여행지를 물색하게 된다. 이미선은 진작 다녀왔지만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몇 군데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이번에는 유럽으로 방향을 돌렸다. 서유럽 4개국 810일 상품이 눈에 들어온다. 영국의 런던, 프랑스 파리, 스위스 융프라우,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 피렌체 등 명승지로 구성된 상품이 아주 구미를 당긴다. 몇 군데 여행사를 골라서 세세하게 내용을 분석해보니 참좋은 여행의 상품이 가장 나은 것 같다. ‘참좋은 여행사는 바람직한 회사 운영으로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신문에 소개된바 있어서 내가 자주 이용하는 여행사이다.

서유럽 담당자 홍성우님과 통화를 하고 1027일 출발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원래 29일 출발예정이었지만, 참석자 다수가 예약을 파기하는 바람에 이틀 앞당겨진 상품으로 변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행 후의 내 스케즐에 약간 차질이 생겼지만 큰 문제는 아니어서 내가 조절할 수 있었다.

여행일자가 확정되면 그 때부터 마음은 조금 바빠진다. 어깨와 허리의 통증이 더 심해지지 않도록 집근처 회산의원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내심 이 정도는 괜찮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여행기간 중에 더 심해지지나 않을지.....

런던이나 이탈리아는 지금 우리나라와 비슷한 기후라고 하지만 스위스 융플라우는 고산지대라서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겨울옷을 야무지게 챙겨야겠지.

음식도 이미선은 별 문제없이 잘 먹었다고 하는데 서양음식이 내 입에 얼마나 맞춰줄는지.... 그렇다고 김치나 멸치를 따로 싸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이번에도 소화제와 구급약은 새로 구입하여 가방에 넣었다.

내가 열흘쯤 마산을 떠난다고 별 문제야 있겠냐만 그래도 행여 미진한 부분이 있는지 챙겨보았다. 1027일부터 열흘간 수영강습에는 참석할 수가 없고, 야외스크린 11월 정기모임도 참석이 어렵겠구나. 벽골회 불금모임도 한 번은 빠질 수밖에 없겠고....

발걸음도 가볍게 유럽으로 떠나볼거나~~~

 

1027()

11시 반에 인천국제공항 대합실에서 가이드와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6시 반 마산에서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탔다. 5시간 소요되기 때문에 도로 정체만 없으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금강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다닐 기회가 잘 없다보니 오랜만에 들리는구나. 금강의 푸른 물결은 여전하네. 군포를 지날 때는 약간 정체가 있었지만 버스는 인천 송도에서 일부 손님을 하차시키고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전혜영 가이드를 만나서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오늘은 20명이 출발하고 내일 파리에서 17명이 합류를 하여 모두 37명이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고 한다. 유럽 여행 상품은 운영되는 방식이 약간 다르구나. 가이드가 인천에서 같이 출발하니까 안심이 되네....

비행기 좌석 티켓팅하는 방법도 아주 간단하다. 전혜영 가이드가 내 폰으로 보내준 탑승권을 아시아나 발권 직원에게 여권과 함께 보여주는 것으로 상황종료. 점점 종이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어간다. 수화물 부치고 나서 다시 가이드에게 갔더니 마일리지 신청이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접수를 하라고 한다. B18코너에서 마일리지를 취급하고 있었다. 탑승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도 완료. 유럽까지 왕복 마일리지를 챙기는 것으로 제주도 다녀오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한다. 다음에 제주도 갈일이 있을 때는 필히 아시아나를 타야겠네.

출국수속을 밟아 출국장으로 나갔다. 8번 게이트에서 2시부터 탑승이 시작되었다. 나는 발을 뻗을 수 있도록 통로 쪽 좌석을 요구하였더니 가이드가 19D 좌석을 지정해 놓았다. 자리를 잡고 돌아보니 3명씩 3칸이니까 한 줄에 9명이 앉게 된 비행기에 빈 좌석이 거의 없다. , 방학도 아닌데 유럽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나?

2시 반에 출발한다던 비행기가 315분이 되어서야 이륙하였다. 런던까지 비행시간은 11시간 20분이고 비행거리는 8,870km라고 한다. 비행기가 이륙하여 안정궤도에 들어서자 기내식이 나왔다. 한식메뉴를 골랐더니 하얀 쌀밥에 쇠고기, 각종 야채와 된장국 등이 나왔다. 한국 비행기 기내식은 먹을 만 하다니까. 식사를 마치고 커피도 마셨다. 그리고 아시아나에서는 캔막걸리를 비축하고 있는 줄 안다. 달라고 하였더니 컵과 함께 국순당 캔막걸리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시원하게 한잔 들이켰다.

우리나라 비행기라 영화, 음악, 드라마 등 입맛에 맞는 프로를 선택하여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는 것이 시간 때우기 좋겠지? 1탄 쥬라기 월드, 2탄 톰 레이더, 3탄 오리엔트 특급 살인, 4탄 쥬만지, 5탄 스타워즈까지 무려 5편을 연속하여 보았다. 9시간쯤 걸렸나 몰라.

두 번째 기내식은 새우가 들어간 흰죽과 빵을 먹었다. 착륙할 시간이 다 되어가니 화면에서 피로를 푸는 스트레칭이 나온다. 따라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굳었던 근육이 살살 풀어지는 것 같구나. 괜찮은 서비스인데~~

 

새벽 240, 현지시간 오후 640분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가 나오나싶었는데 마중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 같이 나온 전혜영 가이드가 전화로 버스를 부르더니 우리를 인솔하여 버스에 태우는 것이 아닌가. 유럽여행 가이드는 팔방미인이구나.

전혜영씨가 런던에 대하여 간략하게 얘기를 해 준다. 히드로 공항은 개관한지 4년 되었다나. 런던은 1년 중 250일 이상 비가 내리는 도시라고 한다. 그래서 방수가 되는 바바리코트가 유명하단다.

HESTON HYDE RESORT HOTEL은 공항에서 20분 거리에 있었다. 137호를 배정받았다. 여기는 1층을 Ground Floor‘0’으로 표시한다. 그래서 137호는 2층이다. 조그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서 방으로 들어갔다. 숙소는 아담하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특히 욕실은 장애인도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다. 샤워부터 먼저 하고 소주 한잔 하면서 가방을 챙겼다. 공항이 가까워서 비행기 소리가 요란스럽다. 이것 때문에 밤잠 설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wifi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가 인쇄물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이런 서비스도 아주 기분이 좋네. 한국은 새벽이지만 가족 카톡방에 소식을 전했다.

 

 

1028()

7시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간밤에 비행기가 얼마나 뜨고 내렸는지 몰라도 깨지 않고 잠을 잘 잤다. 간단히 세면을 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호텔 아침식사는 빵과 버터, 우유는 기본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빵에 치즈를 얹고 버터도 바르고 잼까지 찍어서 맛있게 먹었다. 요플레는 제조성분과 방식이 다른지 우리나라에서 먹던 맛이 아니다. 토마토와 계란찜은 그런대로 맛이 괜찮았다.

 

9시에 가방을 모두 챙겨서 호텔을 나왔다. 조금 가다가 영국 현지가이드가 버스에 올랐다. 롱코트를 입고 긴 부츠를 신은 멋진 아줌마는 영국에서 30년을 살고 있다고 한다.

영국여왕이 살고 있는 버킹엄 궁(Buckingham Palace)으로 갔다.1703년 버킹엄 공작 존 셰필드의 저택으로 세워진 것을 1761년에 조지 3세에게 양도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증개축을 한 후 사저로 이용되다가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식 때에 궁전으로 격상되어 이후 역대 군주들이 상주하였다. 영국 군주의 공식적인 사무실 및 주거지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현재 영국 왕실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2의 호수를 포함해 약 17에 이르는 대정원, 그리고 무도회장, 음악당, 미술관, 접견실과 도서관 등이 들어서있다. 버킹엄 궁의 방은 스위트 룸 19, 손님용 침실 52, 스태프용 침실 188, 사무실 92, 욕실 78개이다. 궁전에 근무하는 사람의 수는 약 450, 연간 초대객은 4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더불어 궁전의 내외 호위를 담당하는 왕실 근위병 교대식은 볼거리로 매우 유명하다.

궁전 앞의 원형광장에는 빅토리아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너머로는 세인트 제임스 공원과 트라팔가 스퀘어로 이어지는 더 몰 산책로가 우거진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따라 자리 잡고 있다. 광장 한켠에는 1833년 왕실 근위대 막사로 건립된 웰링턴 막사가 있다. 현재는 근위대 박물관과 근위대 예배당이 들어서 있다.

영국 왕의 정전인 버킹엄 궁의 역사는 1703년 버킹엄공 존 셰필드가 뽕나무 밭을 구입하여 버킹엄 하우스(Buckingham House)를 지으면서 시작된다. 처음엔 보잘것없는 벽돌로 지은 저택에 불과하였으나 1761년 조지 3세가 자신의 왕비 샤를로트를 위해 이 저택을 구입한 이후 왕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어 왕위에 오른 조지 4세는 건축가 존 내시의 충고에 따라, 벽돌집이었던 버킹엄 하우스를 바스산 석재로 장식하여 외관을 바꾸고 정문을 설치하면서 네오클래식 양식의 궁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궁의 서쪽 부분이 마련되는 것도 이때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등극하자 바로 이 궁전에 거처를 정했고 이 때부터 내시가 설계한 대리석 궁륭인 마블아치(Marble Arch) 위에 궁정깃발이 펄럭이게 된다. 이후 공사가 계속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동쪽 건물이 완공되면서 남쪽 건물 및 북쪽 건물과 이어져 사각형 안마당이 형성되고, 1913년 더 몰 가와 직선으로 연결된 건물과 발코니가 들어섰다. 이 발코니가 국경일이 되면 왕실 가족이 나와 국민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곳이다. 왕이 궁전에 있을 때에는 궁전 정면에 왕실기가 게양된다.

영국의 명물이자 중요한 관광 이벤트인 근위병 교대식은 4월에서 7월까지는 매일 1, 나머지 철에는 2일에 한 번씩 오전 11시 혹은 1130분에 열린다. 근위대는 척탄병 근위대(Grenadier Guards), 콜드스트림 근위대(Coldstream Guards), 스코트인 근위대(Scots Guards), 아일랜드인 근위대(Irish Guards), 웨일스인 근위대(Welsh Guards) 등 다섯 부대로 구성되어있다. 근위대는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의 짙은 남색깃을 단 붉은색 상의에 검은 곰털로 만든 둥근 통 모양의 모자를 착용한다. 계급이나 부대는 모자의 왼쪽이나 오른쪽에 꽂는 털색과 상의의 단추배열 등으로 구분된다. 특히 왕의 생일에 거행되는 가장 화려한 사열식을 트루핑 더 컬러(Trooping the Color)라고 한다.

버킹엄 궁전 외관을 구경하는 내내 비가 내렸다. 중앙에 영국국기가 걸려있는 것을 보니 여왕이 궁에 안 계신모양이다. 주말에는 다른 궁에서 보낸다고 했지....

 

버킹엄 궁전에서 하이드 파크광장이 바로 연결된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공원을 산책했다. 호수에는 천둥오리, 거위, 백조, 펠리칸, 검은 백조 등등 많은 새들이 유유히 돌아다니고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는 다람쥐, 청솔모 등도 볼 수 있었다.

 

시내로 걸어 나왔다. 런던 중심가와 바로 연결이 되는 지역인가보다. 고전적인 형식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서울이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라고 하던 소리를 들었는데, 런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 앞으로 방문하게 될 유럽의 도시는 대부분 이렇겠지~~

시내 한복판에 영국과 연관이 있는 나라의 명사들의 동상이 있었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 미국의 링컨 대통령, 인도의 간디수상, 영국의 처칠수상 등등 옛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던 대영제국의 영광을 간직하고픈 마음에서 이런 공간을 만든 것 같다.

런던의 명물과 사진을 찍으라고 시간을 준다. 런던의 우체통, 공중전화박스, 그리고 이층버스가 3대 명물이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붉은색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체통은 황갈색으로 되어 있고, 공중전화박스는 휴대폰에 밀려 쓰레기통(?)으로 전락하여 문이 열어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바로 앞에 웨스트민스트사원이 있었다. 서쪽에 있는 대사원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성공회의 성당이다. 7세기 초에 처음 건설되어 11세기 참회왕 에드워드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증축하였고 12세기 헨리 3세가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으며 18세기에 들어와 2개의 첨탑이 세워지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참회왕 에드워드가 죽은 후 정복왕 윌리엄 대공이 왕위를 빼앗아 대관식을 치른 이래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에드워드 5, 8세를 제외한 영국의 모든 왕이 대관식을 거행한 장소다. 또한 대관식뿐만 아니라 왕실의 결혼식과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진다. 내부에는 역대 왕과 여왕, 정치가(처칠, 글래드 스톤 등), 문학가(셰익스피어, 워즈워스, 찰스 디킨스 등), 과학자(뉴턴, 다윈 등), 음악가(헨델 등)가 잠들어 있는 묘와 기념비가 있다. 이 중에서도 뉴턴의 묘와 챕터 하우스는 영화 다빈치 코드의 배경이 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관광객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영국의 성당 중 가장 높은 본당과 16세기 초 지어진 아름다운 직립식 천장으로 유명한 헨리 7세 예배당,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역사가 그려진 대형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들어오는 팔각형의 챕터 하우스 등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장소다. 20114월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조금 더 걸어가니 사각형의 높은 탑에 공사용 비계를 둘러쳐 놓은 것이 보였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의회의사당 동쪽 끝에 있는 종탑 시계, 빅벤이다. 빅 벤은 크다라는 뜻을 지닌 ‘Big’과 시계탑을 설계 공사한 설계자 벤자민 홀설계자의 이름을 딴 ‘Ben’을 합친 말로 처음엔 시계탑의 이름이 아닌 시계탑 안의 13.5톤에 달하는 종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높이 96m, 시계 문자판 지름 7m, 시침의 길이는 2.9m, 분침의 길이는 4.2m로 시계가 처음 작동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을 정도로 정교함과 정확성을 자랑하며 이는 런던의 자부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런던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곳이 바로 빅 벤이라고 할 만큼 런던의 랜드마크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곳이다.

 

바로 앞에 템즈강이 흐르고 있었다. 템즈강에는 수많은 다리가 놓여있는데, 국회의사당 근처에는 녹색으로 칠이 된 교량과 붉은 색으로 칠이 된 교량이 있다. 지금은 그런 구분이 없어졌지만 처음에는 상원과 하원, 귀족용과 평민용으로 구분되어 있었단다.

템즈강 유람선은 옵션품목이다. 1시간 유람선을 타는데 40유로. 전원 탑승에 동의하여 가이드와 함께 모두 선착장으로 이동하였다. 유람선도 종류가 아주 많았다. 우리가 탑승한 유람선은 단층으로 천정과 벽체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서 런던 중심가를 구경하는데 별 지장은 없었다. 탬즈강의 물은 깨끗한 맑은색이 아니라 중국의 황하강처럼 누른 흙탕물이다. 강바닥이 뻘로 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강변에 오래된 군함이 정박해 있다. 이 배는 6.25전쟁 때 참전한 배라고 한다. 지금은 퇴역하여 템즈강에서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단다. 배를 타고 가면서 가이드는 유명 건물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였지만 기억이 나지도 않을뿐더러 기억할 필요도 없지. 다만 대관람차 런던아이(London Eye)는 확실하게 눈에 띈다.

21세기 밀레니엄 계획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브리지부터 버틀러스워프까지 약 2km 정도 재개발을 통해 밀레니엄 마일로 새롭게 태어난 동시에 1999년 말 21세기의 개막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 브리티시 항공에서 135m 높이의 런던 아이를 세웠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관람차로 처음에는 5년만 운행하려 했으나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 영구적인 운행을 허가받았고 현재는 트사우즈 그룹에서 인수, 운영하고 있다. 마치 자전거 바퀴처럼 생긴 동그란 휠에는 32개의 캡슐이 달려 있는데 1개의 캡슐에 최대 25명까지 탑승할 수 있으며 한 바퀴 도는 데 30분이 소요된다. 이용객이 많을 때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기까지 1~2시간 정도 걸리므로 사전에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가는 것이 유리하다(인터넷 예약 시 10% 할인). 영화 이프 온리의 배경지로도 잘 알려진 런던 아이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 반경 40km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게다가 노을이 지는 해질녁이면 아름다운 런던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어 낭만적인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매년 런던 아이에 탑승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35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어 이제는 런던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자리 잡은 명소이다. 입장료는 약 20파운드, 3만원 정도.

 

가이드가 런던 브리지를 소개한다. 자주 부르는 동요 속의 유명한 올드 런던 브리지(The Old London Bridge)1176~1209년 사이에 콜처치의 피터에 의해서 건설되었는데, 로마 제국 말기와 초기 중세에 건설된 여러 목조 교량들 중 마지막 남은 것들을 대체하게 되었다. 폭이 다양한 교각 위에 건설된 19개의 아치들은 그 폭이 너무 좁아서 강물이 흘러내려가면서 와류를 형성했다. 가장 넓은 아치는 폭이 10.4m이고 가장 좁은 것은 폭이 약 4.6m이다. 강의 중앙에 있는 가장 높은 교각 위에는 예배당이 있다. 방어탑이 도개교 쪽으로 약간 돌출하며 있으며 또 다른 방어탑이 사우스워크 쪽 강가에 세워져 있다. 완공된 후 3년이 지나 화재에 의해서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재난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재난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우수한 주거용지와 사업용지로서 계속 이용되었고 다리상의 도로가 가옥과 상점으로 채워졌는데, 이중 여러 개는 강 위로 돌출하여 있었다. 이 다리는 시내 상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건설된 웨스트민스터 다리가 완공되기 전인 1740년대까지는 템스 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교량이었다.

1750년대에 찰스 러벨리에 의해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1820년대에 이르러 존 레니 경이 설계하고 그의 아들에 의해서 건설된 뉴 런던 브리지(New London Bridge)를 통해 예전의 구조를 헐어내고 완전히 새로운 구조물로 변신했다. 뉴 런던 브리지는 5개의 아치만으로 건설되었는데, 중앙에 있는 아치의 경간은 45.7m이다.

1960년대에 다시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이 다리의 석조 조각물은 분해를 해서 대서양을 횡단하여 미국까지 건너가게 되었으며, 철근 콘크리트 심재 위에 새로 부착하여 애리조나 주의 레이크하바수 시에 재건축되어 관광 명소가 되었다.

 

배는 유명한 타워 브리지까지 와서 회전을 했다. 타워 브리지는 영국 산업혁명의 표상이자, 런던의 상징인 다리이다. 템스 강은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주요 무대여서 하루에 수백 척의 배가 템스 강을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6m 이상인데다가 다리와 강 수면이 10cm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배들이 쉽게 통과하지 못했던 탓에 1894년 빅토리아 양식의 개폐식 다리인 타워 브리지가 완공되었다. 원래는 초콜릿 브라운 색상으로 칠했는데 1977년 붉은색과 흰색, 파란색으로 도색을 해 현재와 같아졌다고 한다. 총 길이가 250m, 다리 하나의 무게만 해도 1,000톤 가까이 되며 들어 올리는 데에 130초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대형 선박이 지나갈 때에는 다리 중앙이 위로 올라가며 팔자 모양이 된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현재는 다리가 올라가는 횟수가 일주일에 2번 정도로 줄어들었다

 

건너편에 내렸다. 조금 전에 지나쳤던 런던탑이다. 가이드는 여기서 사진도 찍으며 쉬라면서 20분가량 시간을 준다. 런던탑에 입장하려는 관광객이 긴 줄을 이루면서 서 있었다.

정복왕 윌리엄 1세가 대관식(1066년의 크리스마스)을 마친 뒤, 토착상인사회를 지배하고 중요한 항구였던 런던 소()를 통제할 목적으로 요새를 세웠다(런던 소는 19세기 들어서 그 하류에 선착장을 건설하기까지 가장 중요한 항구로 사용되었음). 화이트 타워라고도 불리는 중앙 본체는 로마 시대 때 지은 성벽 바로 안쪽에, 노르망디의 케인 지역에서 실어온 석회석을 재료로 1078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12, 13세기에 성벽 밖으로 요새를 넓혔고, 화이트 타워는 안팎으로 동심원(同心圓)을 이룬 방벽의 중심이 되었다. 안쪽 '장막'(방벽)에는 13개의 탑이 있는데 이 가운데 유명한 것은 블러디 타워, 비첨 타워, 웨이크필드 타워이다.

바깥 방벽에는 6개의 탑과 2개의 능보가 있다. 그 둘레에는 해자(垓字)를 파서 템스 강에서 물을 끌어왔으나 1843년부터는 물을 빼버렸다. 해자 바깥 성벽에는 대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銃眼)이 있으며 그중 몇 개에서는 지금도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포를 쏜다. 영국 왕실의 의전(儀典)에 쓰이는 보물과 의복들은 이곳 지하에 있는 '주얼 하우스'(Jewel House)에 보관한다. 런던 탑 건물 전체의 면적은 7이다. 유일한 육로 출입구는 남서쪽 귀퉁이에 있으며 런던 시내와 연결된다. 런던의 주요교통로로 강을 이용하고 있었을 때는 대개 13세기에 만든 수문으로 드나들었다. '반역자의 문'이라는 수문의 별명은 오랫동안 감옥으로 쓰이던 런던 탑에 호송되는 죄수들이 이 문으로 지나갔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많은 죄수들이 이곳의 타워 그린에서 살해되거나 처형되었으며, 성 바깥의 타워 힐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당하기도 했다. 오늘날 화이트 타워에 있는 무기창고와 그 옆에 있는 17세기 후반의 벽돌 건물에는 중세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무기와 갑옷, 투구가 소장되어 있다.

런던 탑은 17세기까지 왕의 공관으로 쓰였다. 이 당시에는 조폐국·법령보관소·공문서보관소·왕립동물원(라이언 타워) 등도 이곳에 있었으나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탑 안에는 수비대가 있으며 런던 탑 경내에서는 런던 시장과 주교의 관할을 받지 않는 '자유'가 있다.

이곳은 국왕을 대신하여 언제나 육군원수 중에서 임명되는 관리장관이 장악하고 있다. 이 곳의 관리장관은 타워 그린에 있는 16세기 여왕의 집에서 살며 흔히 '비피터'(beefeater)라고 부르는 보초 근위병을 다스린다. 그들은 지금도 튜더 왕조 때의 제복을 입고 있다. 런던 다리 하류에서 템스 강을 가로질러 도시 중앙으로 통하는 유일한 다리인 타워 다리(1894)가 런던 탑 옆에 있다.

 

점심식사는 현지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빵이 나오고 나서 스테이크가 쟁반에 담겨 나왔다. 식빵도 딱딱해서 맛이 없었지만 고기도 마블링이 별로 없어서 내 입에는 별로다. 절반만 썰어먹었다.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은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ㅎㅎ

 

런던 하이드파크 옆의 캔싱턴 가든로얄 알버트 동상앞에서 잠시 사진 찍는 시간을 가졌다. 금술이 유난히 좋았던 빅토리아여왕이 남편을 잃고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든 동상이라고 한다.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이름을 날리던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심도 함께 넣어서.... 맞은편에는 로열 앨버트 홀이 있다. 앨버트 공이 건립한 문화 공연장으로, 엔지니어 프랜시스 포크가 설계하여 1871년에 완성되었다. 이 홀은 로마의 원형 경기장을 본떠 만들어졌으며, 외벽은 붉은 벽돌로 지어져 아름답다.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 주로 클래식 콘서트장으로 이용되며, 복싱 경기나 비즈니스 회합, 코미디 쇼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요즘에는 특히 여름 8주 동안 세계 최대 규모로 열리는 프롬나드 콘서트장으로 더욱 인기가 높다. 우리나라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올 819일에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2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쇼팽센터에 들렀다. 각종 가죽제품, 가방, 머플러, , 양산, 필기구 등등 생필품을 살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라미만년필도 진열되어 있구나. 가격은 약간 저렴한 편이네. 나는 가능하면 이번여행에서는 쇼핑을 자제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조금 구경하다가 나왔다.

 

대영박물관으로 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이다. 정확한 명칭은 영국박물관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고 한다.

1753, 왕립 학사원장을 지낸 의학자 한스 슬론 경(Sir Hans Sloane)이 남긴 수집품과 왕실에서 가지고 있던 콜렉션이 더해져 영국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작품이 많지 않았던 초기에는 몬터규 후작의 저택에 전시되었지만, 그 후 전 세계에서 기증한 작품과 다양한 작품 구매 덕분에 전시품들이 많아짐에 따라 1824년 로버트 스머크 경(Sir Robert Smirke)이 설계한 신고전양식인 현재의 건물로 옮겨지게 되었다. 자연사 소장품들은 자연사 박물관으로, 도서관의 책은 영국 도서관으로 옮겨지는 등 전시품들이 다시 정비되기도 했다.

지금의 영국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선사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고학 및 민속학 수집품들이 볼만하다. 대표적으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로마 등에서 시작된 고대 문명에 대한 전시품들이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미라와 로제타석은 언제나 관람객들로 붐비는 섹션이다. 또한 내부에는 한국관이 200011월에 신설되었는데, 구석기 유물부터 조선 후기 미술품까지 두루 전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로제타돌인 것 같다. 입구의 매장에도 로제타돌의 크고 작은 복제품을 많이 팔고 있었다. 이 비문으로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었다. 길이 114, 72인 로제타석은 모양이 다듬어지지 않은 검은 현무암으로 되어 있으며, 오랜 세월에 마모된 채로 있다가 17998월 알렉산드리아 북동쪽 약 56지점의 로제타(라쉬드) 마을 부근에서 부샤르 혹은 부사르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인에게 발견되었다. 1801년 프랑스가 이집트를 포기한 뒤 이 돌은 영국인의 손에 들어가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외관상 멤피스의 사제들이 쓴 듯한 비문은 프톨레마이오스 5(BC 205~180)의 은혜를 요약하고 있으며, 그의 즉위를 기념해 재위 9년째에 씌어졌다. 이집트어와 그리스어의 2가지 언어와 상형문자·민용문자(民用文字이집트 상형문자 필기체그리스 알파벳의 3가지 필기방식으로 씌어진 이 비문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석하는 열쇠를 마련해주었다.

해독작업은 주로 영국의 토머스 영과 프랑스의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했다. 로제타석의 상형문자 본문에는 6개의 똑같은 테두리(상형문자를 둘러싼 타원형)가 있는데, 토머스 영이 이 테두리를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으로 해독해 다른 비문에서 발견된 같은 테두리가 오랫동안 짐작해온 대로 왕의 이름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또한 새나 동물이 바라보는 그림의 방향을 조사해 상형문자의 부호 읽는 방법을 알아냈다.

1821~22년 샹폴리옹은 영이 다 못한 부분에서 출발해 로제타석 연구에 바탕을 두고 신관문자(神官文字)와 상형문자 해독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각 이집트 상형문자 부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전체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이집트학 학자 가운데 최초로 이들 부호 중 일부는 알파벳이고 일부는 음절을 이루며 또 다른 일부는 전체 개념이나 앞서 표현한 대상을 나타내는 한정사(限定詞)라는 것을 알아냈다. 또한 그는 로제타석의 상형문자 본문이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어를 번역한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이 두 사람의 업적은 그 뒤 모든 이집트 상형문자 문서 해석의 기초가 되었다.

가이드는 지하실로 내려가서 아프리카 전시실부터 보여주었다. 그리고 중요한 작품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며 이해를 도와주었다. 벽에 새긴 조각에서 사자 사냥하는 모습과 화살촉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당연히 설명을 들으며 보는 것과 그냥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집트 유물도 많다. 특히 미라는 이 박물관에 가장 많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의 유물이 많이 보관되고 있는 것도 이채로웠다.

한국관은 방3개 모형의 기와집과 장독대, 부채 등을 진열해 놓았다. 초라한 모습이다. 반면 중국관은 면적도 넓고 유물도 많아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로 가기위해 유로스타를 타러 런던역으로 갔다. 역이 너무 거대하다. 가이드의 리드가 없으면 어디가 어딘지 도대체 알 수가 없겠다. 역내에도 온갖 명품매장과 식당이 복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우리나라와 일본처럼 앙숙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도버해협을 관통하는 유로스타를 건설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로스타는 도버 해협 해저 터널(유로터널)’을 통과한다. 1987~88년에 도버 해협 양쪽에서 굴착 공사를 시작해 1991년에 완성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19945월에 개통되었다. 터널은 총연장 55(해저구간은 약 37)3개의 터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2개는 고속 열차가 다니는 곳이고 나머지 하나는 안전과 서비스를 위한 곳이다. 현재 이 터널에서 시속 300의 고속열차인 유로 스타(Euro-star)가 런던-파리, 런던- 브뤼셀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출국수속과 입국수속을 위하여 여권검사를 2차례 받았다.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지급받은 도시락을 끌러서 김밥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5Gate를 통과하여 4호차 28번 좌석에 앉았다. 좌석이 생각보다 좁다 더구나 마주보게 앉은 좌석은 발을 펼 수가 없어서 불편하였다. 덩치가 큰 유럽 사람들은 불편하여 어떻게 타고 다니지? TGV 열차는 오후 71분에 출발하여 약 2시간 20분 소요된 920분에 파리에 도착하였다.

 

전혜영 가이드는 파리에서도 버스를 오게 하여 우리를 Campanile Blanc Mesnil Hotel로 안내했다. 807호를 배정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도 wifi는 무료로 사용할 수가 있다고 한다. 어제처럼 샤워하고 나서 가족 카톡방에 들어가서 오늘의 소식을 전했다. 오늘 함께한 맴버들의 구성을 보면 용인에서 오신 줌마님들 8(2명은 게스트), 거제에서 온 가족4(고교생 아들 둘), 목포에서 오신 모녀(결혼한 딸)와 이모(?) 3, 58세 외할아버지와 14살 손자 2, 언제나 다정히 손을 잡고 다니는 50대 후반 부부와 나 이렇게 20명이다. 특이한 것은 58세에 14살 손자라니!! 계산이 복잡하다.ㅎㅎ

오늘 하루 엄청 많이 걸었구나. 그리고 늦은 시간에 호텔로 들어왔으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가볍게 소주 한 잔하고 자리에 들었다.

 

 

1029()

75분에 일어났다. 모닝콜이 안 들어왔는지, 늦잠이 들어서 못 들었는지 모르겠네. 간단히 세면을 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8시부터 입장이 된다고 하여 조금 기다렸다. 식단은 어디나 비슷하다. 빵과 쥬스, 버터와 요플레 등으로 식사를 했다. 이 호텔에서 2박을 하기 때문에 큰 가방은 호텔에 두고 작은 가방에 필수품만 챙겨서 내려왔다.

어제 저녁에 인천에서 파리로 오신 17명과 함께 버스를 탔다. 대구에서 12명이 한 팀으로 침석을 했고, 결혼 1년차 신혼부부 2, 60대 부부 2, 60대 후반 부인 1명 이렇게 17명이다. 혼자오신 부인은 내가 관심을 가질 여건(?)이 못된다.

버스를 타니 파리 가이드가 인사를 했다. 머리 스타일과 외형이 여자(?)스럽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00라고 했는데....

 

첫 코스로 파리 중심가에 있는 개선문으로 향했다. 튈르리 공원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과 라데팡스에 있는 신개선문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가 50m, 폭이 약 45m1806년 오스텔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건축가 장 프랑수아 살그랑의 설계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의 첫 번째 패배로 공사가 중단되고, 나폴레옹의 사후인 1836년에야 루이 필립의 요구로 겨우 완성된다.

나폴레옹 1세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 개선문을 살아 있을 때는 통과하지 못하고, 죽은 후에 그의 유체가 개선문 아래를 지나 파리로 귀환해 앵발리드 돔 교회 아래에 매장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 점령에서 파리를 해방시킨 드골 장군이 이 문을 통해서 행진하기도 했다.

개선문의 벽에는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졌고, 아부키 전쟁, 터키에서의 승리, 오스텔리츠 전쟁 등 나폴레옹의 전쟁에서 영광스러운 장면들이 여러 개의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또한 개선문의 안쪽 벽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부대를 지휘했던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전쟁 중에 전사한 사람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져 있다.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무덤이 있는데, 매년 714일 이곳에서 군사 행렬을 한다. 1111일에는 무명 용사의 묘비 앞에서 군사들을 기억하는 행사가 있다.

개선문이 있는 샤를드골 에투알 광장(La Place Charles de Gaulle Étoile)12개의 대로가 별 모양으로 둘러싸 있어서 별처럼 보인다고 해서 별이라는 뜻의 에투알 광장이라고 불린다. 그 대로 중 하나가 샹젤리제 거리이다. 개선문 옥상전망대에 오르면 에투알 광장의 모습과 더불어 파리 시의 전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개선문은 조망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옥상전망대에 오를 수 없었다. 개선문이 정면에서 보이는 도로에서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개선문 중앙에 바리게이트를 쳐놓고 유리온실 같은 가건물을 짓고 있었다. 무슨 행사가 있을 모양이다.

 

파리를 대표하는 샹젤리제 거리를 조금 걸었다. 샹젤리제 거리는 마리 드 메디시(Marie de Médicis)가 튈르리 정원에서 이어지는 산책길을 만들었는데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조성으로 유명해진 르 노트르(Le Nôtre)에 의해 조성되었다. 나중에 그리스 신화에서 낙원이라는 의미의 앨리제를 따서 앨리제의 뜰이라는 뜻의 샹젤리제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샹젤리제는 용사들의 영혼이 머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장소 이름이다.

샹젤리제 거리는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 나무들로 조성된 전체 약 2.3km, 폭이 약 70m의 거리로 개선문 쪽은 화려한 상점들로 이루어져 있고 콩코르드 광장 쪽으로는 울창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나폴레옹 3세 때인 19세기 후반 파리의 부호들과 정치인, 예술가들이 개인 저택을 갖게 되면서 세련된 취향과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레스토랑과 유명 브랜드, 화랑들이 들어서면서 유명해졌다. 특히 이곳은 노천카페로도 유명하다. 프랑스인들에게 샹젤리제는 축구 경기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몰려드는 곳 중 하나이고, 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가 이 거리를 통해서 지나간 후에는 승리의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댄 브라운작가의 소설 다빈치코드의 배경으로 더욱 명성이 자자한 루브르박물관으로 갔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긴 줄을 서야 하는데 우리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예쁜 도우미 아가씨들의 협조로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입장할 수 있었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이자 파리 최고의 박물관이다. 루브르가 최초로 박물관이 된 것은 1793년으로,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낀 루이 14세가 베르사유에 화려한 궁전을 지어 거처를 옮긴 뒤 초기에는 왕실에서 수집한 각종 미술품을 보관 · 전시하는 소극적 의미의 미술전시관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집권한 이후 수많은 원정 전쟁을 통해 예술품을 매입, 선물, 약탈하면서 대규모 박물관으로 변모하였다. 루브르 미술관의 전시 작품은 크게 인류의 4대 문명의 시원을 나타내는 고고학 유물과 그리스도교 전례 이후의 서양 문명, 중세 예술, 르네상스 예술, 근대 미술 및 극동 지역 미술품으로 나누어진다.

원래는 바이킹의 침입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요새였다. 이후 16세기 때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새롭게 개조되었고, 이어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등 많은 왕족들이 4세기에 걸쳐 루브르 궁전을 확장하고 개조했다. 하지만 루이 15(Louis XV)가 베르사유로 궁전을 옮기고 나서 루브르는 주인 없는 궁전으로 방치되다가 나폴레옹 1세가 다시 루브르 궁전에 관심을 갖고 미술관으로서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고, 나폴레옹 3세가 1852년에 북쪽 갤러리를 완성하면서 오늘날 루브르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 후 1981년에는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Grand Louvre) 계획으로 전시관이 확장되고 1989년 박물관 앞에 건축가 I.M. 페이(Ieoh Ming Pei)의 설계로 유리 피라미드를 세우면서 대변신을 하게 되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225개 전시실에는 그리스, 이집트, 유럽의 유물, 왕실 보물, 조각, 회화 등 40만 점의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루브르 박물관 마당 중앙의 유리 피라미드는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가장 큰 출입구라서 항상 사람들이 많이 붐빈다. 중국 출신 미국인 건축가 I.M.페이가 디자인한 신현대적인 유리 피라미드는 르네상스 앞마당의 품위를 해친다고 믿는 전통주의 신봉자들의 냉소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페이를 비평하는 이들은 이 피라미드를 칠판위의 손톱자국이라고 비꼬았지만, 진보적 옹호론자들은 22미터 가까운 높이의 투명한 피라미드를 새 천년으로 루브르를 이끄는 신구의 상징적인 연결고리로서 고대 구조와 현대 방식의 빛나는 결합, 그 이상이라며 환영했다.

가이드는 반지층으로 내려가서 중세 루브르 궁전의 복원한 성채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이어서 1층으로 가면서 수많은 조각상들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인체의 수학적 비례로는 그리스 여성미의 전형으로 여기는 밀로의 비너스가 가장 대표적이다. 철저하게 균형과 비례에 충실함으로써 이상적 인간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했다. 기원전 2세기경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으로 알려진 이 상은 그리스인의 예술적 표현이 도달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한쪽 다리를 구부려 살짝 기울어진 몸의 균형을 잡고 있다. 유연하게 휘어 곡선으로 이어지는 몸의 윤곽이 우리 눈을 사로잡는다. 또한 의복 주름이 미끄러질 듯 내려오면서 다리의 아름다운 선을 절묘하게 묘사한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전체 표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 미학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비례에도 충실하다.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비율로 생각한 ‘1:1.618’의 황금비가 적용되어 있다. 비너스 상에는 여러 부분에 황금비가 담겨 있다. 배꼽을 기준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이 이 비율이다. 상반신만 놓고 보면 머리끝에서 목까지와 목에서 배꼽까지의 길이의 비율, 하반신에서는 발끝부터 무릎까지와 무릎부터 배꼽까지 길이의 비율이 그러하다.

쉴리관에서 드농관으로 이어지면서 2층 입구에 양 날개를 뒤로 젖힌 채 비상을 준비하는 듯한 머리 없는 여신인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 니케상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니케(Nike)’, 영어식으로 읽으면 스포츠회사 브랜드로 유명한 나이키다. 반면 로마 신화에서는 빅토리아(Victoria)’라고 부르는데, 승리를 뜻하는 영어 단어 빅토리(victory)’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1863, 에게해 북서부의 작은 섬 사모트라케에서 백여 점의 파편 조각으로 발견됐지만 끝내 머리와 양 팔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머리와 양팔이 없어서 오히려 양 날개가 더욱 시선을 잡는 효과를 준다. 날개가 일으킨 바람에 드레스가 휘감긴 모습은 승리의 여신이 지금 막 나에게 날아오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기원전 190, 로도스 섬의 주민들이 에게해에서 일어난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대리석 조각상으로 추정된다. 사모트라케는 이 조각상이 발견된 곳의 지명이다.

이어지면서 벽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벽화의 크기가 정말 대단하다. 그렇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있는 곳은 가로 53cm, 세로 77cm모나리자가 걸려있는 6전시실이다.

모나리자는 리자 부인이라는 뜻이다. 리자 부인이 수수한 검정 드레스를 입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다. 이 초상화를 보면 여인의 눈썹이 없는데 그 이유는 당시에 넓은 이마가 미인으로 여겨져서 여성들이 눈썹을 뽑는 것이 유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줍은 듯 살며시 입에 머금은 모나리자의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미소가 되었다.

이 작품은 피란체의 부유한 비단 장수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로부터 아내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모나리자는 음악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가수와 연주자를 불러 그녀가 항상 신비로운 미소를 짓게 했다고 한다. 다 빈치는 이 그림을 4년 넘게 그렸다.

다 빈치는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와 살아 있는 듯한 얼굴, 그리고 손을 스푸마토 기법으로 표현했다. 스푸마토란 윤곽선을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그리는 방법으로 배경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져 신비롭게 보이는 기법이다.

어떤 방에는 천정에도 대형 그림을 그려놓기도 하고 화려하게 치장을 해놓기도 하였다.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호칭에 전혀 손색이 없다. 이러니 세계에서 파리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명작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다보니 오래 감상하고 있을 형편이 못 된다. 적당히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바라보는 루브르 궁전도 무척이나 크고 화려하다. 그리고 입장하기 위하여 긴 줄을 이루고 있는 행렬을 보노라니 그냥 한숨만 나온다.

 

점심식사는 서울 오페라식당에서 한식으로 먹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는 어디라도 술 반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서 내가 준비한 소주를 꺼내기 망설여진다. 그래도 가지고 온 것은 어찌할거나. 살짝 마셔야지. 이번 여행에서는 술잔을 주고받을 형편이 안 된다. 다행히 1년차 신혼부부 새댁이 소주를 냉큼 받는 것이다. 살짝 건배를 하고 나도 한 잔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용인 줌마님들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빼오셨다. 양이 많아서 반씩 나눠마셔도 충분하다.

 

가이드가 명품관이 가득한 00백화점에서 1시간 반을 주면서 우리를 풀어놓는다. 규모가 굉장하구나. 우리나라 백화점에도 좋은 물건이 많은데.... 현지에서 사면 비행기 삯이라도 빠질 수 있을까? 이 건물 마지막 층은 초대형 라운지로 되어 있었다. 마누라가 있었더라면 맥주라도 한 잔 했을 텐데^^ 진열된 로렉스 시계 중에 가장 비싼 것이 32,450라고 적혀있다. 4,200만 원쯤 되는구나. 우리 결혼 때 주고받았던 론진시계도 오랜만에 구경하였다.

 

파리의 상징이자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을 보러갔다.

에펠탑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마르스 광장에서 사진부터 먼저 찍었다. 당연히 여기도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소품을 팔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대부분 흑인청년들이 가방에 열쇠고리나 에펠탑 축소모형 등을 넣어 다니면서 단체손님들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우리말을 아주 잘하는 청년에게 이목이 쏠렸다. ‘내일입대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한국사람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물건을 파는데 우스개소리도 곧잘 하면서 제법 매상을 올리는 것이다. 서울에서 몇 년 살았다고 한다.

에펠탑 전망대에 오르는 엘리베이터와 세느강 유람선 관광은 85의 선택사양이다. 모두 선택하였기 때문에 가이드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가까이서 본 에펠탑은 정말 굉장했다. 1889년이면 우리나라는 대원군이 집권할 때인가? 우물 안 개구리로 세상물정 모를 때 유럽은 이렇게 거대한 철 구조물을 파리 한복판에 설치하였던 것이다.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세계 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구조물로, 세계 박람회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비행기에서도 박람회 위치를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설계로 세워진 에펠탑은 원래는 박람회가 끝나면 철거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파리하면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상징이지만 당시 파리 시민들은 예술의 도시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 추악한 철덩어리라 하여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특히 파리의 예술과 문학계 명사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1909년엔 철거될 뻔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산이 없는 파리에서 최신 송신 안테나를 세우기에 이상적이라는 이유로 위기를 모면했기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에펠탑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건물 전체가 철골 구조로 되어 있고 그래서 강한 바람에도 13cm 이상 흔들리지 않고, 기타 위험으로부터 탑을 잘 고정시켜 준다. 또한 철골이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는 15cm가 더 길어진다고 한다.

탑의 높이는 꼭대기의 텔레비전 안테나를 포함하여 324m이고, 3층까지는 총 1,652개의 계단이 있고, 철골을 조립하는데 약50만개의 리벳을 사용하였다. 총 무게는 10,000톤이고 4년마다 도색 작업을 하는 데 들어가는 페인트는 50~60톤이 소요된다고 한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가? 정말 다행스럽게도 줄 서는 인파가 별로 없었다. 20여분 기다려서 2층 구조의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커다란 원통형의 압력탱크를 이용하여 오르내리게 설계하였단다. 토머스 에디슨이 설계했다고 했지. 압력탱크가 위로 쑥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엘리베이터도 따라서 올랐다가 내렸다가 한다는데, 정확하게 어떤 원리인지 건축을 37년 동안 했던 나도 그림이 안 그려진다. 2층이라고 하지만 높이는 100m정도 되었나보다. 해도 거의 다 졌고, 바람은 세차게 불어서 상당히 추운 날씨라 바깥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2층 난간에서 파리 시내 사진을 많이 찍었다. 개선문도 보이고 유유히 흐르는 세느강에는 많은 유람선이 정박해 있는 것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초고층 아파트는 하나도 안 보인다.ㅎㅎ

에펠탑 2층까지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는데도 5를 내야 한단다. 웃기는 곳이구먼. 3층까지 오르는 계단은 없고 엘리베이터를 타야 오를 수 있다. 구경하는 사이에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에펠탑을 나올 때는 전체가 노란 황금색 불빛이 감싸고 있어서 또 다른 느낌을 갖게 하였다.

 

'STAR KING'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순두부. 그런데 맛이 왜이래? 영 아닌데... 주방장 솜씨가 이래서야 되겠나. 양념치킨, 통닭도 있던데 순두부만 그런가? 김치와 나물로 밥 한 공기를 비웠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그런대로 식사를 하셨네. 내 입맛만 비정상인가?

근처에 'K Mart'가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여기도 교포가 제법 많이 살고 있나보다. 한국에서 수입한 술, 과자, 고기, 양념, 사탕 등등 없는 것이 없다. ‘월매 막걸리가 눈에 띄어서 얼른 한 병 샀다. 3.12니까 4,000원정도 되나. 허 참, 여기서 막걸리를 살 수 있다니...

 

야간 유람선을 타러 세느강 선착장으로 갔다. 우리가 탄 배는 2층 구조로 된 유람선인데 길이가 제법 길었다. 밤바람이 차가워서 밖으로 나갔다가 안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에펠탑은 매시간 정각이 되면 자체발광의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배를 타고 조금 지나자 에펠탑 전체에서 번쩍이는 섬광을 뿜어내더니 1시간이 지나 하선할 무렵인 9시가 되니까 똑같은 섬광을 발산하는 것이다. 제법 볼만하네. 유람선을 타서도 에펠탑 야간사진을 잔뜩 찍었다.

 

오늘도 밤 10시가 넘어서 호텔에 들어왔다. 이렇게 강행군을 하려면 정말 체력이 좋아야 한다. 다행히 일행 중에서는 낙오자 없이 무난하게 잘 진행되고 있다. 욕조에 물을 받기가 귀찮아서 샤워만 하고 말았다. 소주 한 잔하고 자리에 들었다.

 

 

1030()

6시에 모닝콜이 들어왔다. 머리가 좀 묵직하구나. 깊은 잠을 못잔 것 같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가방을 모두 챙겨서 로비로 내려왔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다. 일기예보 상으로 강수확률이 60%를 넘는다고 우산을 꼭 챙기라고 한다. 서유럽은 겨울이 우기라서 비가 자주 내린단다. 기온은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지만 체감온도는 영하 10도를 넘을 때도 있다고 한다.

건강, 안전, 그리고 소매치기 주의이 세 가지를 가이드는 틈만 나면 강조한다. 세계각처에서 발생한 전쟁이나 내란 등으로 난민이 많이 발생하여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들의 생계수단은 과연 무엇일까?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길을 묻거나,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아는 체를 해도 일절 대꾸도 하지 말란다. 그리고 가방은 반드시 앞으로 매라고 한다. 여권을 분실하면 최소 이틀은 꼼짝없이 갇히고 마니까.

오늘은 베르사이유 궁전을 구경하는 날이다. 원래 어제 계획이었는데, 월요일은 휴관이라 화요일 휴관하는 루브르박물관과 일정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베르사이유 궁전은 상당히 복잡할 것으로 예상을 한다면서 가이드도 걱정을 많이 한다. 궁전은 여름궁전과 겨울궁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루브르 궁전 같은 겨울궁전은 실내장식에 치중을 하고 여름궁전은 밖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정원이 화려한 특징이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대표적인 여름궁전이라고 한다.

 

잠시 비가 들치더니 이내 멎었다. 다행이다. 베르사이유 궁전도 웅장함 그 자체다. 우리가 1시간 일찍 서둘렀는데도 불구하고 궁전 앞에는 상당히 많은 인파가 줄을 서 있었다. 가이드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적다고 조금만 기다리면 입장 할 수 있다고 한다. 40분을 기다렸다. 왼쪽 건물로 들어섰지만 관람은 맞은편 오른쪽 건물로 들어가서 차례차례 구경하면 결국 왼쪽 건물 출구로 나온다고 한다. 궁전은 형태로 되어 있었다.

태양왕 루이 14(Louis XIV)는 신하인 재무장관 푸케(Nicolas Foucquet)의 보르 비 콩트(Vaux-le-Vicomte) 성을 둘러보고 온 후 성의 어마어마한 화려함에 자존심을 다치게 되었고, 그래서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을 하게 된다. 푸케의 성에 관련된 건축가 르 보(Le Vau),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 실내 장식가 르 블랑(Charles Le Brun), 조경가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참여해 50년 동안 막대한 비용을 들여 궁전을 지었는데, 원래 습지였던 이 땅의 자연 조건을 완전히 바꾸어서 숲을 만들고, 분수를 만들기 위해 몇 개의 강줄기를 바꾸고, 거대한 펌프를 만들어 센 강의 물을 길어다 부었다고 한다. 또한 궁전의 상판에서 천장의 못 하나까지 모두 장식을 할 정도로 화려하게 궁전을 지었다.

1682년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궁전을 옮긴 후 매일같이 수백 명의 귀족들이 모여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이것은 루이 14세에게 언제 반기를 들지 모르는 귀족들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나약하게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일들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입구로 들어가자 긴 복도는 고관대작, 명사들의 동상이 줄지어 서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엄청 크고 넓다. 맨 먼저 헤라클레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북쪽 날개에서 중앙까지 연결해 주는 곳에 있는 이 방은 궁전의 방 중에서 가장 크다. 벽난로 위에는 베로네즈의 성경을 주제로 한 대형 회화가 있고, 천장에는 르 모안이 1733~1736년에 그린 헤라클레스를 예찬한 천장화가 장식되어 있다. 고급스런 항아리, 가구, 커피 잔 등도 같이 진열되어 있다. 하나같이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었다는 느낌이 팍팍 와 닿는다. 정말 화려함의 극치를 구경하고 있구나. 내 눈이 너무 호사를 누린다.

풍요의 방(Salon de l’Abondance), 비너스의 방(Salon de Venus), 디아나의 방(Salon de Diane), 마르스의 방(Salon de Mars), 머큐리의 방(Salon de Mercure), 아폴론의 방(Salon d’Apollon), 전쟁의 방(Salon de la Guerre) 등등 각 방은 저마다 화려한 벽화와 장식물로 치장을 해 놓았다. 특히 거울의 방(La galerie des Glaces)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총 길이 73m, 넓이 10.50m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17개의 창문과 578개의 거울이 있는 방이다. 1678~1684년에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서쪽 회랑 전체를 차지한 이 홀에서는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천장에는 르브룅(Lebrun)이 루이 14세의 생애를 그린 대벽화가 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 황금 촛대, 화병 등의 장식품도 당시의 최고급품으로 놓여 있다.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 승전한 프로이센이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언했으며, 1919628일 이 방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어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종결지었다.

그리고 둥근 천장 창이 있는 대기실(Salon de l’œil de Bœuf)은 왕의 침실과 입구 사이에 있는 방으로 왕을 알현하려는 왕족들의 대기실로 쓰던 방이다. 그래서 이 방에서는 갖가지 음모가 꾸며졌다고 한다. 그 외 왕의 침실(Chambre de Roi), 국무회의실(Cabinet du Conseil), 평화의 방(Salon de la Paix), 왕비의 침실(Chambre de la Reine), 귀족의 방(Salon des Nobles), 대기실(Antichambre de la Reine), 경호원들의 방(Salle des Gardes de la Reine)등이 있다.

그 시대의 화가들은 이렇게 큰 그림을 어떻게 그려내었을까? 역시 짧은 안목으로 이런 명작들을 감상하려니 내 몸만 피곤하다. 그냥 이곳에 왔다는 기억만 가지고 가면 안 될까?

 

점심식사는 현지식으로 달팽이 요리라고 한다. 고동 비슷하게 생긴 것을 쟁반에 6 개씩 담아서 식탁에 얻어놓는다. 내용물을 꺼내 놓으니 시커멓게 생긴 것이 돌돌말린 것 같아서 썩 내키지는 않았고, 먹어봐도 무슨 맛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여행사에서는 이딴 것을 가지고 마치 대단한 요리인양 호들갑을 떨다니.... 이어서 스테이크가 나왔지만 영국에서 먹었을 때와 맛이 비슷하다. 절반 정도만 먹고 나왔다.

 

프랑스 일정을 모두 마치고 스위스로 이동하기 위하여 역으로 갔다. 이번에도 TGV를 탄다. 기차표를 받아보니 1515분에 출발하여 1821분에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한다고 적혀있다. 3시간이 넘게 걸리는구나. 그런데 여기서는 여권 검사가 필요 없나보다. 영국에서 프랑스 올 때처럼 그런 절차는 없었다. 저녁 식사용 도시락을 하나씩 나누어 주면서 기차가 움직이면 적당한 시간 봐서 먹으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팀원끼리 앉은 사람들이야 상관이 없겠지만 내 좌석은 외국인 3명과 같이 앉게 되었다. 김치며 반찬 냄새를 퐁퐁 풍기면서 도시락 식사를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배도 그렇게 고프지 않아서 그냥 배낭에 넣어두었다가 호텔에 가서 먹었다.

기차가 출발하였다. 시가지를 벗어나니 벌판에 눈이 내린 흔적이 보인다. 산악지방으로 올라가나보다. , 그림으로만 보던 스위스 땅을 밟아보다니.... 정식 명칭은 스위스연방공화국이며, 면적은 41277, 인구는 8121830(2015년 현재), 수도는 베른(Bern)이다.

종족구성은 독일계 65%, 프랑스계 18%, 이탈리아계 10% 등이다. 언어는 독일어 70, 프랑스어 20, 이탈리아어 9의 사용도를 보이며, 국민의 41.8가 가톨릭교를 믿으며, 35.3가 개신교를 믿는다. 위도와 해발고도가 높지만 기후는 온화한 편이다. 지하자원이 부족하여 원자재를 수입, 가공하여 수출하는 경제구조이므로 외국의 경기변동에 큰 영향을 받는다. 알프스산맥과 수많은 자연호수로 이루어져 관광자원과 수력자원이 풍부하며, 기계·화학·금속·약품공업 중심의 고도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 안정된 정치경제적 여건 아래 사회도 매우 안정되어 있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6757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58687달러이다. 국토의 1/4이 높은 알프스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력 이외의 다른 천연자원은 거의 없다. 여러 종족·종교·언어를 극복하여 관습의 통일을 이루었고 약 7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를 유지해왔다.

 

인구 800만 남짓한 조그만 나라이고, 자연환경도 그렇게 좋지 못한 것 같은데 어떻게 1인당 국민소득이 6만 불을 넘을 수 있나? 물가가 비싸기 때문에 가이드도 스위스에서 쇼핑은 하지 말라고 한다.

제네바에 도착하니 이미 어둑어둑하다. 버스를 타고 3시간가량 더 달려서 인터라켄에 도착하였다. 호텔은 4층 건물로 기억된다. 호텔 입구가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큰 가방을 들고 오르기에 힘이 들었다. 나는 37호 방을 배정받았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작아서 3인만 탈 수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숙소로 올라갈 수 있었다. 방은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이 건물은 목조구조라고 한다. 방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었다. 샤워나 목욕하다가 물을 마루 바닥에 흘리면 아래층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손해배상을 엄청나게 해야 한다고 겁을 준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내일은 5시에 일어나서 620분에 호텔을 나가야 한단다. 집에 소식 전할 시간도 없다.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우고 간단히 샤워하고 나서 자리에 들었다.

 

1031()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흐트러진 가방을 정돈하여 로비로 내려왔다. 아침식사는 도시락이 준비되어 있어서 하나씩 지급받았다. 도시락에는 빵과 주스, 사과 등이 들어있어서 식사로 대체하기에는 약간 아쉬웠지만 식당 문도 열기 전인 새벽에 일찍 나가야하는 일정 때문에 별 도리가 없겠다고 인정할 수밖에.

호텔 앞 정거장에서 기차를 5분정도 타고 가서 내렸다. 여기서 융프라우로 가는 산악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융프라우 정상까지 다녀오려면 산 밑에서 기차를 운행하는 회사와 산 위에서 운영하는 회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기차를 5회나 갈아타야 한단다. 융프라우 가는 기차는 레일이 특이하다. 두 줄 철로 외에 중간에 톱니바퀴처럼 생긴 철로가 하나 더 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톱니바퀴처럼 생긴 레일에서 힘을 비축하여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당겨주고 하나보다.

 

어둠이 가시고 하늘이 밝아온다. 융프라우 행 기차를 타면서 일행들 얼굴에는 모두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여 지금도 산악회 주전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외국 관광을 떠나도 문화유적 살펴보는 것도 좋지만 좋은 산에 올라 맑은 공기와 멋진 풍광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큰 즐거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3,454m 전망대(융프라우요흐)에서 융프라우 정상을 쳐다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나를 들뜨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스위스의 정경은 정말 목가적이다. 논 덮인 높은 산이 나타나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가는 폭포수가 흘러나온다. 만년설이 녹아서 흐르는 물일까? 절벽 밑으로 제법 큰 마을이 보인다. 이런 곳에서 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고, 호텔도 운영하면서 생활하나보다. 열차가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눈으로 덮인 산이 확대되어 나타난다. 산 중턱에 약간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것이 빙하라고 한다. 눈이 쌓이고 쌓이면 저렇게 얼음의 형태로 되나보다. 그리고 하중이 증가하다가 어느 시점에 떨어져 내려온다고 한다. 기차를 한 시간쯤 탔구나. 내려서 열차를 갈아타야 한단다. 중간 역에서 정상으로 올라갈 기차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제법 보내야했다. 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것이 완연한 겨울날씨다. 제법 넓은 레스토랑이 있어서 잠시 몸보신을 할 수 있었다.

40여분 기다려서 정상으로 오르는 붉은색 기차를 탔다. 여기서부터 전망대까지는 대부분 터널이다. 터널을 지나다가 잠시 머문다. 해발 3160m에 위치한 아이스메어 역이라고 한다. 아이거 산을 뚫어 만든 터널 속에 있는 임시역이다. 5분간 정차하는 동안 뷰포인트에서 거대한 빙하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람이 많아서 그냥 열차에 앉아있었다. 아마도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한 휴식시간이 아닐까. 40분을 달려서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융프라우요흐(젊은 처녀의 어깨)역에 도착하였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철도역으로 1896년에 착공하여 1912년에 완공하였단다. 플랫폼에 적혀있는 각 나라의 인사말에는 환영합니다라는 우리말도 보인다.

 

가이드를 따라 터널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매장이 나왔다. 광고판에 신라면도 붙어있어서 반가움이 묻어났다. 'TOUR'라고 쓰여 있는 표식을 따라 걸어갔다. ‘융프라우파노라마관에서는 융프라우 주변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왼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핑스전망대로 올라갔다.

, 주여!! 거센 눈보라로 시야는 제로에 가깝다. 융프라우 정상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융프라우 전망대와 산 정상을 멋지게 찍어서 전시해 놓았건만 실물은 눈보라 속에 파묻혀버렸다. 잠시 야외테라스로 나와서 눈보라속의 인증샷만 날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실내의 엘리베이터 벽에 붙여놓은 융프라우-유럽의 지붕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20098월 초에 코타키나바루에 갔던 기억이 난다. 동남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말레이시아의 해발 4095m인 코타키나바루산이다. 밑에서 볼 때는 하늘도 맑고 청명하여 정상에 오를 수 있음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발 3300m인 산장에서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입산허가를 기다리다가 결국 아침9시에 철수해야만 하는 곤란지경을 당해야 했다. 워낙 바람이 세게 불어서 입산불허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정상을 바로 눈앞에 두고 내려와야 했던 기억이 너무 선명하여 세월이 가도 잊을 수 없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가이드를 따라 알파인센세이션, 무빙워크, 얼음궁전 등을 구경했다. 알파인센세이션은 동굴을 특정조명으로 실내장식을 해놓은 공간이라고나 할까. 입구에는 에델바이스 꽃 조명을 많이 달아놓았다. 입구를 지키는 목각염소의 표정이 재미있다. 황금시계를 찬 소도 있구나. 큼직한 대왕스노우볼이 있고 옆에는 미니스노우볼도 있다. 25프랑이란다. 무빙워크를 타고 가는 벽면에는 융프라우 철도를 개설하는 과정이 전개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이런 곳에 철도를 개설하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천재임이 틀림없다. 이런 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이곳까지 관광 올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를 반대하는 멍청한 환경론자들은 외국의 이런 관광지들을 둘러보고 식견을 넓혀야 한다. 알레치 빙하의 지하 깊은 곳에 얼음궁전을 만들어 놓았다. 길도 얼음길이라 미끄러워 조심스럽다. 빙하가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매년 보수공사를 하고 있단다. 얼음으로 새와 개, , 펭귄 등등 여러 가지 동물조각도 만들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스핑스전망대의 외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융프라우는 라우터브루넨 계곡에 우뚝 솟아 있으며, 해양도시인 인터라켄에서 남남동쪽으로 18떨어져 있다. 베른알프스 산맥에 속하는 경치가 아름다운 산으로 베른 주와 발레 주를 나누며, 그중 다른 두 봉우리들인 핀스터아르호른과 알레치호른은 융프라우의 높이를 능가한다.

1811년 동쪽, 즉 발레 쪽에서 두 스위스인 형제 루돌프 마이어와 히에로니무스 마이어가 처음으로 등반했고, 1865년에 비로소 어려운 서쪽, 즉 인터라켄 쪽에서 두 영국인이 처음으로 산에 올랐다. 1927년에 전문등산가 2명이 남쪽에서 등반했다. 유럽의 가장 높은 철도 중 하나인 융프라우 철도는 아이거와 묀히 산허리를 지나 묀히융프라우 사이의 고갯길인 융프라우요크까지 길이가 약 7되는 터널을 통과한다.

 

구경을 다 마치고 40여분 기다렸다가 하산 기차를 탔다. 그런데 기차가 20분쯤 내려가다가 멈추어버린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리더니 다시 원위치로 올라가는 것이다. 외부 일기가 불순하여 열차가 정상적인 운행을 하지 못하고 있단다. 이거 참 큰일 났네. 지금 하산을 해야 우리 일정에 차질이 안 생기는데.... 무려 세 시간을 매장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다시 올라온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출입통제가 발령되는 바람에 우리가 타고 올라 온 기차가 마지막 기차였단다. 어째 융프라우요흐 매점에 사람들이 없더라니까. 그리고 지금 관광객을 싣기 위하여 올라온 기차도 어렵게 어렵게 올라왔다고 한다. 모두 탑승하여 자리에 앉았다. 기차는 속도를 줄여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올 때 기차를 갈아탔던 역에서 다시 다른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면서 내리라고 한다. 다른 기차가 몇 시에 올라올지 기약이 없다. 가이드는 추위에 사람들을 방치할 수 없다면서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아 감자튀김 등 간단한 간식을 대접했다. 37명이 조금씩 맛을 본 감자튀김 17세트가 무려 52만원이나 나왔다고 가이드는 기겁을 한다. 전혀 예상에 없던 지출이었으니까~~ 1시간이 지나서야 새 기차가 왔다. 마지막 기차라 무조건 타야한다.

 

12시 반에 하산 완료해야 하는데 오후 5시 반이 넘었다. 최소 5시간을 산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천재지변이라고 하나? 시간이 너무 늦어서 우리 가이드도 마음이 바쁘다. 호텔로 가서 가방을 모두 꺼내어 버스에 싣고 다음 예정지 이탈리아 밀라노로 출발했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둑어둑해졌고 저녁 식사를 해야지? 한 시간쯤 달려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들어갔더니 곰탕이 준비되어 있었다. 날씨가 차가워 고생했는데 따끈한 곰탕 한 그릇하고 나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스위스 생맥주도 판다고 적혀있는데 배가 불러서 먹을 수는 없다.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고 계속 밀라노를 향해 달려서 두 시간 남짓 지나자 밀라노 시내에 들어올 수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도로정체가 없어서 그나마 빨리 온 것이다. 우리 전혜영 가이드의 결단으로 늦은 시간이지만 두오모 대성당을 구경하고 호텔로 들어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일 일정 소화에 어려움이 많다보니 강행군 할 수밖에 없단다.

 

늦은 시간이지만 대성당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성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줄을 서다니.... 철야 미사를 집전하는 것도 아닐 텐데 무슨 일일까? 성당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뽀족뽀족 솟아오른 십자가모양의 외관은 마치 창을 꼽아놓은 것 같다. 두오모 대성당과 인근 건물들 사이의 일부 도로에는 모자이크 타일로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비토리아 에마누엘라 2세 갤러리아). 가이드의 설명으로 뭔가 의미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광장 중앙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상이 서있다. 동상 아래에 있는 작은 동상들은 제자들이라고 한다. 1386, 대주교 안토니오 다 살루초는 옛 로마 유적지밀라노의 정중앙 지점으로 모든 주요 도로가 이곳에서 뻗어나가는자리에 십자형 네이브와 트랜셉트로 이루어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로 인해 고딕 양식이 알프스를 넘어 북구에서 이탈리아 본토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500년 가까이, 때로는 재정상의 문제로, 때로는 설계상의 문제로 큰 진척 없이 공사는 더뎌지게 된다. 그 결과 건물의 외양은 시각적 모순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육중하면서도 섬세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영감이 빛을 발한다. 수많은 피너클에 플라잉 버트레스, 복잡한 격자무늬 창살로 장식한 동쪽 앱스는 프랑스 고딕 스타일, 팔각형의 르네상스 쿠폴라, 17세기 양식의 복도, 18세기 스타일의 스파이어, 거기에 신고전주의 파사드까지. 스파이어와 가고일, 대리석상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지붕은 도시에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엄청난 규모축구 경기장의 1.5배 넓이로 약 11,706제곱미터에 달한다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 다음으로 가톨릭 대성당으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 다섯 개의 아일이 입구에서 제단까지 이어지고, 거대한 석조 기둥이 네이브를 지배하는 실내는 4만 명의 방문객을 수용할 수 있다. 벽과 벽감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각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데, 3,159개의 조상(彫像) 2,245개는 건물 외부에서만 볼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조각상은 '작은 성모'라는 뜻의 <마돈니나(Madonnina)>로 가장 높은 스파이어 위에 서 있으며 3,900장의 금박으로 덮여 있다. 싫든 좋든 간에 밀라노 대성당(두오모 디 밀라노)은 이런 고생스러운 프로젝트에 달려들 수 있는 정신 나간 자들의 하늘을 찌르는 자만심을 찬양하는 놀라운 걸작이다.

 

대성당의 바로 옆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 거리라 불리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Galleria Vittorio Emanuele II)’가 위치해 있다. 두오모 광장부터 스칼라 광장까지 이어지는 200미터 길이의 아케이드 쇼핑몰인데 반짝이는 유리 천장과 중앙 십자로의 8각형 모자이크 바닥이 눈길을 끈다. 쇼핑몰 하나에도 예술적 감각이 녹아있다니. 아케이드 안에는 프라다 1호점인 프라텔리 프라다(Fratelli Prada)’를 비롯해 구찌, 베르사체, 루이비통 등의 명품 매장이 들어서 있다. 카페와 레스토랑, 서점 등도 있으니 대성당 관광 후 들러보면 좋다.

호텔로 들어왔다. 정확한 이름은 RIPAMONTI RESIDENCE HOTEL이다. 로비에 전시된 모형을 보니 반원형태의 엄청나게 큰 호텔이다. 10층에 있는 2018호를 배정 받았다. 시간도 늦었지만 wifi가 유료라고 하는 바람에 집으로 소식 전하는 일은 포기했다. 이미 12시 반이 넘은 시간이라 간단히 샤워하고 자리에 들었다.

 

 

111()

큰 호텔이 아무래도 식사의 질이 좋다. 식당에서 빵과 치즈, 계란찜 등 입맛에 맞는 음식을 골고루 먹을 수 있었다. 아침에는 우산이 없어도 될 것 같은 비가 살짝 뿌린다. 호텔 정원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탈리아 현지 가이드 김태욱이 버스에 올라 인사를 한다.

오늘은 베네치아(영어로 베니스)로 들어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눈을 좀 붙였다. 중간 휴게소에 들렀을 때 초콜릿을 조금 샀다. 맛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여 선물로 인기가 많다고 하는 바람에 나도 조금 거들었다.

베네치아 시내에 들어가기 직전 점심식사를 했다. 여기도 우리교포가 제법 있나보다. 호텔 입구에 태극기가 걸려있고 식당 메뉴도 한식이다. 점심식사는 쇠고기 전골에 계란찜으로 맛있게 먹었다.

 

바닷가에 철로가 있어서 기차로 여기까지 와서 배를 타고 베네치아로 들어갈 수도 있단다. 다리를 지나 베네치아로 들어갔다. 버스에 내려 선착장으로 가는 길목에 노점상들이 몇 개 있었다. 나는 여기서 장화를 하나 샀다. 비닐보다 고무로 된 장화가 찢어지지 않고 잘 신을 수 있단다. 선착장에서 수상택시를 탔다. 수상택시는 옵션품목으로 50유로를 지불했다. 쾌속선을 탈 수 없는 몇몇 사람은 전혜영 가이드가 인솔하여 큰 배를 타고 오기로 했다. 수상택시에 8명씩 타고 출발했다.

 

반짝 속도를 올려 가더니 이내 정상속도를 유지한다. 귀에 꽂은 리시버로 가이드의 베네치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을 배로 처리한다고 한다. 쓰레기 처리하는 배도 있고, 앰뷸런스 배도 있다. 각종 유람선과 수상택시, 곤돌라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가이드는 지금 눈에 보이는 저런 건물들에 대한 설명을 하지만 돌아서면 잊어지기에 큰 의미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통곡의 다리는 기억이 난다. 재판소와 감옥소를 연결하는 다리라고 했던가? 건물들이 간혹 4층도 있지만 보통 3층이다.

 

제법 얼마를 갔을까. 귀에 익은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창공에 빛난 별 / 물 위에 어리어 /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 아름다운 동산 / 행복의 나폴리 / 산천과 초목들 기다리누나 / 정든 나라에 행복아 길어라 /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한글로 적었지만 원음 그대로 김태욱 가이드가 우리들에게 선물하는 멋진 노래였다. 가이드는 성악가 출신이라고 한다. 지금 가이드를 하고 있으니까 1급 성악가는 아니었는지 몰라도 배를 타고 가면서 베네치아 대운하 위에서 이런 노래를 듣는 호사를 누리다니.... 정말 행복했다.

 

베네치아는 원래 습지대였는데, 6세기경 훈족의 습격을 피해 온 이탈리아 본토 사람들이 간척을 시작, 도시를 건설하였다. 697년 초대 총독이 선출되어 독자적인 공화제 통치가 시작되었다. 11세기에는 십자군 원정의 기지가 되기도 했으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베네치아는 지중해 동부에서 유럽으로 운반되는 상품의 집산지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의 전란으로 사라진 예술과 공예를 그곳 공방에서 소생시키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유리, 양복지, 비단제품, , , 청동 등의 가공기술은 실로 뛰어난 것이었다.[3] 베네치아 공화국이라는 공화국으로 활동하던 베네치아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분쟁을 개신교에 유리하게 중재하여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하고, 1797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침략을 받아 1805년 나폴레옹 치하의 이탈리아 왕국에 귀속되었다. 1815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1866년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베네치아의 원도심은 베네치아 석호 안쪽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으며, 육지로부터 약 3.7 km 떨어져 있다.

 

1000년 전에 대체 어떤 공법을 적용하여 이런 수중도시를 만들었을까? 지금도 바닷가에서 공사를 하려면 많은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거제도에 아파트를 건설할 때, 지하주차장을 만들기 위하여 지하터파기하는 대신 현재지반에서 흙을 쌓아올려 지하층을 만드는 공법을 채택하는 바람에 공사비를 대폭 절감한 적이 있다.

자료를 살펴보니 베네치아 건물의 건축과정이 자세한 알려진 것은 17세기에 이뤄진 연구에 의해서인데,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가 건설될 때는 1,106,657개의 나무 말뚝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나무 말뚝은 4미터 길이였으며, 베네치아의 식민지였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등 아드리아해 연안 도시들에서 나무를 실어왔단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돌이나 시멘트 등에 비해 내구성이 약한 건축자재로 여겨진다. 잘 부러지고, 뒤틀리고, 부식된다. 하지만 물속에 나무를 박아 넣으면서 공기와의 접촉이 없게 되면 곰팡이나 벌레가 끼지 않아 나무가 썩지 않는다고 하는데, 과연 저렇게 거대한 건물이 4m 나무기둥으로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자연히 상당부분 침하도 진행되어 기울어진 건물이 제법 많이 늘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현대적인 공법을 이용하여 보수작업을 하겠지...

 

배에서 내리자 가이드는 산 마르코 광장으로 안내를 했다. 여기서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고 1시간을 주면서 구경을 하라고 한다. , 세상에나... 이런 곳이 다 있다니!! 엄청나게 넓은 광장의 절반 정도가 무릎높이 정도로 물에 잠겨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장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이 많은 곳에는 사람이 다닐 수 있게 1.5m 폭으로 조립식 다리를 설치해 놓았다. 장화가 없는 사람들은 설치된 다리를 통해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만 장화를 신은 나는 종횡무진 돌아다닐 수 있었다. 1층 점포는 상당부분 물에 잠겼지만 그래도 영업을 하는 곳이 많았다. 관광객들이 엄청 많이 몰려다니는데 물이 조금 들었다고 장사를 포기할 수는 없겠지. 국내에서는 이탈리아에서 폭우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나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렇게 물이 차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한다.

산 마르코 광장 : 베네치아의 중심지이자 이탈리아 최고로 유명한 광장. 대부분의 바포레토도 이곳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 아침~낮에 서식하는 닭둘기(?)들은 사람들과 친숙한 것으로 유명해 팔위에 얹어 사진 찍기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고, 저녁~밤중에는 주변 카페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분위기에 취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성당에서 광장 안쪽을 바라봤을 때 왼편에 있는 카페 플로리안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인데, 수백 년 된 커피집인 만큼 이곳 커피 값이 일반 카페의 5~6배나 되는 가격을 자랑한다.

산 마르코 대성당 : 비잔티움 양식으로 건설된 성당. 이슬람교도의 감시를 피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빼돌린 복음사가 마르코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성당 정면을 장식하는 청동 말 4기는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한 전리품으로, 진품은 현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종탑(Campanile di San Marco) : 산 마르코 대성당 앞에 있으며 벽돌을 쌓아 만든 한 변의 길이 12m, 높이 98.6m의 탑으로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건축한지 8백년 가까이 지나서 노후화된 종탑은 1902년 북쪽 벽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점점 커져 같은 해 714일에 완전히 붕괴되어 먼지더미로 사라졌다. 종탑이 붕괴할 때 옆으로 쓰러지지 않고 똑바로 선 상태 그대로 내려앉은 덕분에 산 마르코 대성당은 종탑과 매우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음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의회는 종탑이 무너진 당일 저녁에 재건을 위한 예산으로 50만 리라를 책정했고, 훗날 또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부 보강을 덧붙여서 복원공사에 들어가 1912425일 성 마르코 축일에 개장했다. 최근에는 겨울마다 베네치아에서 일어나는 홍수 아쿠아 알타(Acqua Alta)로 인해 지반이 깎여나가 종탑이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단부 주변의 토양을 두르는 티타늄 고리를 설치했다.

예전에는 종이 매달려 있는 전망대까지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이용했지만 지금은 유료로 운영되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한결 편하게 올라갈 수 있다. 참고로 관광객이 구경하고 있는데도 종 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관광객들 머리 위에 매달린 거대한 종이 울리며 고막테러()를 한다. 여담으로 과거에 베네치아 공화국 시절 5개의 종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첫번째 종은 원로회를 위한 것이고, 2번째 종은 정오를 알리는데, 3번째 종은 일과시간의 시작과 끝, 4번째 종은 원로회의 소집을 알리며 마지막으로 5번째는 사형자의 처형(...)을 알렸다고 한다.

두칼레 궁전 : 베네치아 도제(국가원수)의 공식적인 주거지로 9세기에 건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309년부터 1424년의 기간에 걸쳐 지어진 것이다. 고딕 양식의 건물로, 조형미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뛰어나다. 산마르코 대성당에 면한 쪽에 '문서의 문(Porta della Carta)'이 있는데 옛날에는 여기에 정부의 포고문이나 법령 등을 붙였다. 문 위에 보이는 날개가 있는 사자는 베네치아의 상징이다. 두칼레 궁전의 '10인 평의회의 방'에는 베네치아의 주요 역사를 그린 그림, 원수 76인의 초상화 등이 있다. 두칼레 궁전에서는 산 마르코 광장과 베네치아 석호를 동시에 바라보며 즐길 수 있다.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회장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모두 집결하여 이번에는 곤돌라를 타러갔다. 곤돌라는 여행사가 자랑하는 서비스 품목이어서 전원 참석했다. 곤돌라는 이탈리아어로 흔들리다라는 뜻이다. 배의 양쪽 끝이 위로 굽어 있고 바닥이 평평한 것이 특징인 베네치아의 배라고 한다. 길이 9m, 1.5m 정도로, 운하의 교통수단이다. 선수와 선미에서 사공이 각각 3m나 되는 긴 노를 젓는 것 역시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배를 만들 때 한 조선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내는 게 아니라 용골을 만드는 장인, 노를 만드는 장인, 뱃머리를 만드는 장인 등 각각의 장인들에게 의뢰하여 조립하는 방식이며, 따라서 비싼 곤돌라의 가격대는 억대를 우습게 넘는단다. 현재 베네치아의 영업용 곤돌라는 전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베네치아의 귀족이나 갑부들이 곤돌라를 치장하는 것에 도가 지나쳐, 1562년에 시령(市令)을 공포해 검은색으로 전부 통일시켰기 때문이다.

곤돌라는 폭이 좁아서 좁은 수로를 용이하게 다닐 수 있어서 베네치아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는 교통수단이다. 이 작은 배에 우리는 6명씩 나누어 타고서 30분 정도 베네치아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야경이 볼만하다고 하지만 그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고, 큰 배를 타고 버스에서 내렸던 선착장으로 나왔다.

 

김태욱 가이드는 임무 완료하여 집으로 보내고 우리는 점심식사를 했던 식당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저녁식사는 스파게티와 스테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내 입에 맞는 맛있는 현지식이란 존재할 수가 없지. 스파게티는 거의 손을 대지도 않았고, 스테이크는 절반만 잘라 먹고 포크를 놓았다.

 

CASTELLI HOTEL 113호를 배정받았다. 이 호텔이 여태까지 묵었던 숙소 중에서 가장 깔끔하다. 그리고 방 전면에 대형 거울을 설치한 것이 이채롭다. 거울 속에 내가 사진 촬영하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오늘은 시간적으로 약간 여유가 있어서 wifi를 통하여 가족들에게 밀렸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어느덧 여행 후반기로 접어드는구나. 여태껏 본 것만 해도 문화적 충격이 대단하였지만 아직 남은 일정이 있으니 기대가 된다. 가지고 갔던 댄 브라운천사와 악마를 읽다가 자리에 들었다.

 

 

112()

6시에 일어나서 7시에 식당으로 내려와서 토스트와 버터, 치즈 등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8시에 로비로 모였다. 오늘은 피렌체로 간다. 전혜영 가이드는 비렌체로 가는 버스에서 고전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여주는 묘기를 부렸다. 미국 파라마운트 픽쳐스에서 1954년에 만든 흑백 영화로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았다. 이미 TV를 통하여 두세 번 보았지만 이탈리아 버스 안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내일 구경할 로마에 대한 사전 지식을 영화를 통하여 예습하게 한 가이드의 기지가 아름다웠다.

 

두 시간 남짓 달려 휴게소 들렀다. 이탈리아의 휴게소는 온갖 먹거리와 잡동사니가 많아서 간단한 쇼핑을 할 수 있는 기회이지만 나는 Eye Shopping만 하고 나왔다. 1시간 20분을 더 달려서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피렌체 가이드 이종경과 만났다.

이종경은 여기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걸작 다비드상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다. 피렌체에는 다비드상이 3개 있는데 진품 다비드상은 아카데미아 갤러리에, 모조품 두 개 중 하나는 시청사 앞에, 또 하나는 여기에 있는 것으로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진 청동 모조품이라고 한다.

피렌체 시가지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벨베데레 요새와 이어지는 성벽은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의 방위를 위해 건설했다. 고대 번영했던 피렌체공화국. 오른쪽으로 두오모와 세례당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베티오궁의 첨탑, 그리고 앞으로는 아르노강이 흐르고 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가 처음 꽃핀 곳이다. 미켈란젤로 광장에 서면 피렌체 시가지가 온톤 장밋빛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석양 무렵에 가보면 꽃의 도시가 황혼에 젖어드는 모습을 지켜 볼 수가 있다고 한다. 15세기 메디치 가문의 열성적인 후원에 힘입어 화려한 르네상스 문화를 꽃 피운 이탈리아 피렌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다.

사방을 둘러보며 충분히 구경을 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은 다음 가이드를 따라 시내로 내려왔다. 피렌체 시내도 고대건축의 집합소 같다. 수백 년도 더된 건축물이 즐비하다. 그 사이의 골목길은 폭이 6m정도나 될까. 양쪽에 승용차를 주차해 놓으니 걸어가기가 쉽지 않구나. 가이드는 수시로 차 조심하란다. 여기는 사람보다 차가 우선인가?

 

피렌체 대성당 앞 광장에서 잠시 구경을 한 다음 점심식사부터 하고나서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두오모는 성당이라는 뜻으로 밀라노 두오모라고 하면 밀라노 성당이고 피렌체 두오모 하면 피렌체 성당이라는 뜻이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본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으로 꽃의 성모 마리아란 뜻을 가졌다. 성당 내부를 구경할 여건은 안 되고 외관만 둘러보았다.

워낙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곳이다 보니 예약을 한 식당도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은가보다. 잠시 뜸을 들인 후 식당으로 갔는데 점심 메뉴로 스파게티와 피자, 그리고 닭튀김이 나왔다. 원래 피자의 본고향이 이탈리아 아니었던가? 그런데 맛이 왜 이래? 피자도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우리 입맛에 맞도록 개량되었나보다. 내 입은 이탈리아 현지식에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구나. 절반도 못 먹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거이드는 우리를 골목길로 데리고 가서 허름한 집 앞에 세우더니 설명을 한다. 단테 박물관이라고 한다. 이 박물관은 피렌체에서 유일하게 단테의 생애와 작품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원래 단테의 집(Casa di Dante)’으로 추정되었지만, 지금은 피렌체 시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단테 관련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이 단테의 집으로 최종 결정된 것은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던 1865년의 일이지만, 과연 단테가 살았던 집인가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1911, 피렌체 시는 건축가 주세페 카스텔루치에게 의뢰하여 지금의 카사 디 단테를 신축하게 했다. 시간을 잘 맞추면 단테의 신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하는 연극배우의 무료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도로에는 단테의 옆모습이 각인된 대리석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벽 선반에 모셔놓은 단테의 흉상은 마치 만화에 나오는 마귀할멈을 연상케 한다. 보기 좀 그러네....

 

광장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지만 피렌체 두오모조토의 종탑이 단연 압권이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서 큰 건물은 대부분에는 종교시설과 궁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렌체 두오모 앞 광장에는 군대의 5분 대기조같은 병력과 트럭이 한쪽에 대기하고 있고, 마차가 다니면서 관광객을 유혹하기도 한다. 앰뷸런스도 석대나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수시로 사고가 발생하는 모양이다.

중앙에 있는 팔각형 3층 건물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철창으로 막아놓은 대문은 황금벽화로 장식되어 있구나. 이곳은 산 조반니 세례당이라고 한다. 1059년부터 1128년까지 건설되어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피렌체식 로마네스크 양식을 띄고 있다.

화가들은 이젤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인물화도 즉석에서 그려주나 보다. 할까말까 망설이다 그냥 지나쳤다.

조토의 종탑은 피렌체 출신 화가 조토와 그의 제자 피사노가 함께 작업해 14세기 말에 완성한 종탑이다. 두오모와 마찬가지로 외관은 장미색, 흰색, 녹색의 3색 대리석을 이용해 정교하게 만들었다. 종탑 최하단에 장식되어 있는 붉은색 패널 안에 있는 부조는 안드레아 피사노의 작품이다. 현재 종탑에 장식되어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원작은 두오모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414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 높이 84m의 꼭대기에 도달하면 두오모의 웅장한 모습과 피렌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뇨리아 광장은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이 접해 있는 광장으로 13~14세기에 조성되었으며, 중세 이후 지금까지 시청사로 쓰이고 있는 베키오 궁전과 더불어 역사 깊은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베키오 궁전 앞의 대광장에는 첼리니(Cellini)<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넵투누스 분수>와 코시모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복제품 등이 있다. 넵투누스 분수 옆의 돌바닥에 박혀 있는 둥근 금속은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가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다 화형에 처해진 곳을 표시한 것이다.

고딕 양식의 건물인 베키오 궁전은 높이 94m의 종탑이 솟아있다. 2층의 대회의장 ‘500인 홀에는 화려한 벽화가 있는데 코시모 1세의 승전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작품이다. 회화 외에도 미켈란젤로의 <승리>, 도나텔로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등 조각들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베키오 궁전 옆에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미술관인 우피치 미술관이 있다. 광장에서 도보 3분 거리에 바르젤로 미술관도 있다. 19세기까지는 감옥이었던 건물에 들어선 미술관으로,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와 미켈란젤로의 <바쿠스> 등 르네상스 걸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광장 주변에는 젤라토를 파는 가게, 와인 바, 역사 깊은 카페 등이 늘어서 있으며 광장 동쪽의 산타 크로체 교회 주변은 피혁 제품 상점이 모여 있다. 우피치 미술관을 지나 아르노 강 방향으로 2분 정도 내려가면 보석 전문점이 늘어선 베키오 다리로 갈 수 있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이곳의 보석 전문점은 관광객에게 특히 인기 있다.

 

이 정도로 피렌체 관광을 마치고 로마로 이동하기 위하여 버스를 탔다. 오늘 제법 많이 걸었는지 버스에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진다. 한숨 돌리고 나니 한결 수월하구나. 휴게소에 들렀다. 여기서는 초콜릿 50%세일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조금 더 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됐구나.

저녁식사 전에 쇼핑센터에 들러 귀국선물(?)을 골랐다. 여기에서는 온갖 크림종류, 와인, 비누 등등 생필품들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손녀에게 줄 유아용 비누를 한 세트 구입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손녀용만 눈에 들어오니 작은 일이 아니다.ㅎㅎㅎ

식당은 바로 옆에 있었다. 상호가 금강산이네. 돼지고기 두루치기와 된장찌개가 주메뉴인데 된장찌개에서 일본미소된장 맛이 살짝 묻어났지만 김치와 깍두기도 있어서 오랜만에 밥 한 그릇을 깔끔하게 비웠다.

7일째 숙소는 SAN MARCO HOTEL이었다. 512호를 배정받아 짐을 풀었다. 이 호텔에서 2박을 하니까 여유가 있다. 버스타고 올 때 살짝 눈을 붙였기에 책도 좀 볼 수 있었다.

 

 

113()

가톨릭의 본산 바티칸 시국은 1365일 내내 인파로 붐빈다. 조금이라도 일찍 줄을 서야 관람할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벌 수 있다. 430분에 모닝콜이 들어오고 620분에 버스를 타기로 되어 있었는데, 모닝콜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니면 내 방은 콜을 하지 않았는지 눈을 뜨니 510분이다. 서둘러 가방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 마시니 버스 탈시간이 되었다. 파리에서 합류한 팀은 68일 일정이라 오늘 귀국하기 때문에 두 팀으로 나뉘어 관광에 나섰다.

바티칸 시국(Status Civitatis Vaticanæ, Vatican City State)은 남유럽에 위치한 도시국가(시국), 이탈리아 로마 시에 둘러싸인 내륙국이다. 국교는 가톨릭으로 교황청의 소재지이며, 종교수장이자 선거군주인 교황을 국가원수로 하는 신정제국가다. 또한 국가원수인 교황은 바티칸 시국의 모든 국사에 대해 전제적인 권력을 행사하므로 전제군주제이다. 이 때문에 바티칸은 현존하는 유일한 비세습 선거전제군주제 국가다.

면적은 0.44km2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분류되어 있다. 여의도 면적의 1/6 크기다. 인구밀도를 따지면 1,877/km2로 세계 6위다.

201132일 호주 매체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바티칸의 인구는 여성 32, 남성 540명으로 총 572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티칸에 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실제 인구는 223명에 불과하다. 비록 이탈리아의 로마에 둘러싸인 형태로 존재하지만, 이탈리아와 다른 나라로서 갖출 건 다 갖춘 어엿한 독립국이다. 특히 세계에 퍼진 가톨릭의 위상을 생각하면 국가 규모에 비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1984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바티칸 시국은 교황청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정된 독립국가로서의 교황의 독립 직할령을 지칭하는 명칭이므로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최고 통치기구인 교황청(敎皇廳, Curia Romana, Roman Curia)과는 미묘하게 다른 개념이다. 따라서 교황청과는 조직 자체가 다르고, 시국을 통치하기 위한 별도의 추기경단이 국정을 담당한다.

바티칸 스스로는 세속적인 의미가 강한 '바티칸 시국'도 아니고 엄밀한 의미의 '교황청'도 아닌 성좌(聖座, Sancta Sedes, Holy See)를 대외적인 공식국가 명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를 경우에 따라 '교황', '교황청'으로 번역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성좌에 파견된 한국 대사는 '주 교황청 대한민국 대사'가 되고, 성좌가 한국에 파견한 대사는 '주 대한민국 교황 대사'로 지칭하고 있다.

바티칸 내부의 건물로는 크게 바티칸 미술관, 시스티나 소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등이 있다. 바티칸 미술관은 소위 말하는 세계 3대 박물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예술품과 전시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바티칸 시국에 도착하니 높이 10m정도 되는 성벽을 따라 사람들이 긴 줄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는 입장할 입구를 찾아 줄을 섰다. 줄의 길이가 100m는 족히 되었을까. 가이드 말로는 이 정도의 줄은 긴 편이 아니라고 한다. 줄 서있는 중간에 잡상인들이 지나다니면서 호객행위를 한다. 한 장에 10유로 하는 머플러 같은 것을 나중에는 절반이하, 1/3이하로 낮추면서 사람을 우롱하는 것이다. 사진엽서 20장을 묶어서 파는 장사치도 있었다. 사진이 모두 이곳 바티칸과 로마를 배경으로 찍은 것이고 가격도 저렴하여 나도 하나 구입했다. 줄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어 예상보다 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도 수속이 복잡하다. 가이드가 미리 예약을 한 덕분에 입장권 발급받아 바티칸 시국 안으로 입장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느라 지친 몸을 잠시 추스른 다음 이종경 가이드는 사진이 걸려있는 입간판 앞에서 설명을 했다. 이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최후의 심판일 것이다. 시스티나 소성당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불가하고 또 워낙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가장 유명한 두 개의 그림사진을 입간판에 붙여놓고 가이드가 설명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천지창조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이게 조각품인지 회화인지 사실 나도 몰랐다. 설명을 듣고서야 성당의 벽과 천정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역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주 만나는 내 고등학교 절친의 닉네임이 천지창조. 이 친구는 천지창조가 성당의 천정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귀국하면 물어봐야겠다. ㅎㅎㅎㅎ

미술관에 소장된 무수히 많은 작품에 대하여 전혀 지식이 없는 촌부의 눈에 이런 것들이 얼마나 값어치가 있을지... ‘소 귀에 경 읽기가 아닐는지. 그래도 눈에는 담아 가야지. 언제 다시 올지 기약이 없잖아. 고개를 상하좌우로 돌리면서 가이드가 일러준 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바티칸 미술관은 바티칸 시내에 위치한 미술관(박물관)이다. 물론 따로 건물 하나에 있는 게 아니고 그 유명한 시스티나 소성당을 포함해서 바티칸 내에 있는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들을 통틀어서 부르는 명칭이다.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의 대가들이 남긴 걸작 르네상스 회화들과 역대 교황들이 수세기에 걸쳐 수집한 막대한 미술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바티칸 미술관의 주요 작품]

* 카라바조가 그린 거룩한 매장(1602-1603)을 비롯한 몇몇 그림.

*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성 예로니모의 초상화.

* 프라 안젤리코, 조토 디 본도네, 라파엘로, 니콜라 푸생, 티치아노 베첼리 등 화가들의 작품들.

*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가져 온 붉은 대리석으로 만든 교황좌.

* 초기 그리스도인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과 교리상의 석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의 비문을 비롯한 로마 시대의 조각상과 묘석, 비문 등.

* 아테네 학당으로 대표되는 라파엘로와 그 제자들의 작품들이 있는 라파엘로의 방.

니콜리나 예배당

* 시스티나 성당

* 지도 전시실: 벽면에 교황 그레고리오 13(1572-1585)의 지시로 탁발수사인 페루자의 이냐치오 단티가 그린 이탈리아 전역의 지형도가 있다. 지도 전시실의 위치는 벨베데레의 안뜰 서쪽이다. 전시실의 길이는 120m이다. 이곳에는 이냐치오 단티가 3년 만에 완성한 40개의 패널화가 자리 잡고 있다. 아치 천장의 장식들은 체사레 네비아, 지롤라모 무치아노와 같은 매너리스트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 Basilica)은 흔히 영화에서 바티칸이 나오면 등장하는, 둥그런 광장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곳으로 가톨릭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처음에는 4세기 중반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세워진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이 있었지만 천 년이 넘도록 사용되면서 어지간한 보수 공사로는 더 이상 건물을 지탱하기 어렵게 되자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가 기존의 성당을 철거하고 새로운 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신축 당시 옛 성당이 초기 교회와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건물이니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율리오 2세는 이를 물리치고 기존의 건물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원했다. 이를 위해 도나토 브라만테를 시작으로 줄리아노 다 상갈로,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산치오, 발다사레 페루치, 안토니오 다 상갈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자코모 델라 포르타, 카를로 마데르노, 잔 로렌초 베르니니 등 르네상스~바로크 시대의 예술가들이 120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하여 1626년 교황 우르바노 8세 때 비로소 축성되었다. 건축 과정에서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레오 10세가 면죄부를 발행한 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완공 이후 수백 년 동안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이었다. 정면에서 보면 3개의 발코니가 있는데 그중 가운데 발코니를 보면 창문 옆이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곳은 교황 전용 발코니로, 교황만이 사용할 수 있다. 영화 천사와 악마의 마지막에 새로 선출된 교황이 등장하는 곳이 이 발코니다. 성당 내부에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조각한 성상인 피에타가 있기도 하다.

교황이 직접 나오는 성당이니만큼 들어가려면 몇 가지 복장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슬리퍼는 신고 갈 수 없고 대신 뒤꿈치가 막혀있는 샌들류는 괜찮다. 여자는 무릎 아래로 오는 옷을 입어야 한다. 치마든 바지든 상관없다. 하지만 남자는 무조건 긴바지를 입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또한 민소매 옷은 입고 들어갈 수 없다. 때문에 성당 근처로 가면 숄을 파는 상인들이 있기도 하다. 바티칸에서 한번은 어느 수녀를 문지기로 임명해서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오는 관광객들 복장을 검사하게 한 적이 있었다. 여름 한철 동안 숱한 관광객들을 상대한 뒤 이 수녀는 신경쇠약으로 일을 사임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정면으로 놓고 오른쪽을 보면 건물이 하나 있다. 창문이 많은 건물인데, 교황의 집무실이 있는 사도 궁전이다. 오른쪽 맨 위의 창문이 집무실 창문이라고 한다. 만약 창문들에 덧문이 모두 내려져 있으면 교황이 출타 중이라는 뜻이다.

오랫동안 유럽 미술의 대상이었던 기독교 신앙의 근원인 나라인 만큼 국토 곳곳이 유명 미술작품 천지다. 시스티나 소성당만 해도 미켈란젤로의 천장화가 있는 데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그 유명한 성상인 피에타가 있고물론 이건 대표적인 것만 꼽은 것이고, 이 외에도 굉장히 많다. 그런 연유로 유럽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바티칸 박물관을 꼽을 만큼 유럽 여행 중 필수 코스로 여긴다. 이러한 관광수입은 이 도시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재정의 근간이며, 이 관광객들이 이탈리아를 통해 입국해 이탈리아에도 돈을 뿌려주고 가기 때문에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바티칸은 지역경제를 위해 초특급 대우가 아깝지 않은 나라다. 물론 종교, 신앙적인 측면도 중요하겠지만.

 

시스티나 소성당(Sistine Chapel)은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도 나오는 콘클라베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안쪽의 벽면과 천장들이 전부 미켈란젤로가 그린 프레스코로 이루어져 있다. 천장에 있는 것이 천지창조, 입구 쪽의 큰 벽면을 가득 채운 것이 최후의 심판이다. 프레스코가 빛에 약하기 때문에 내부는 어두우며, 플래시를 막기 위해 안쪽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천사와 악마에 나온 그 장면은 직접 시스티나 소성당에서 찍은 것이 아니라, 따로 세트장을 만들어서 찍었다. 일반 사진기조차 플래시 때문에 사용 금지인데 영화 촬영은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워낙 유명한 곳이고 로마 관광 필수 코스로 여겨지는 곳이라 언제 가도 사람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러다 보니 경비원들이 위에서 말한 카메라로 찍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 외에 조용히 할 것과 벽화를 계속 감상할 사람들을 가운데로 모으고 길을 만든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몰리고 작은 소리도 잘 울리다 보니 특별히 누가 떠드는 것이 아니어도 소란스럽게 느껴지는데 어느 정도 소리가 커지면 신부님이 등장해 가톨릭의 경건한 성당이자 문화재이니 조용히 감상해 달라는 말과 방문자를 축복하는 기도를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 대략 4~5개 언어로 하는 위엄을 보인다.

벽화를 감상할 목적으로 방문했다면 소성당 가운데로 가는 것보다는 의자에 앉는 쪽을 추천하는데, 성당 가운데 서서 천장 벽화를 보게 되면 얼마 안 가 목에 통증을 느끼게 된다.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의자가 벽에 붙어 배치되어 있는데 은근히 경쟁이 치열하다.

 

천지창조 :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에 그려져 있으며, 미켈란젤로는 이것을 그리기 위해 작업대에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힌 불편한 자세로 4년 만에 완성했다. 혼자서 천장화 전체를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프레스코화의 밑바탕이 될 회반죽을 천장에 바르거나 그림에 사용할 물감을 배합하는 일을 돕기 위해 소수의 조수들이 고용되었다.

원래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였으나, 그의 재능을 시기한 도나토 브라만테가 교황 율리오 2세를 부추겨서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림을 그릴 것을 요구했고 미켈란젤로는 이를 받아들였다. 물론, 이 작업은 엄청난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목과 눈에 심한 이상이 생겼다. 게다가 변덕스러운 교황과의 다툼도 있어서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을 매우 괴로워했다. 그가 이 고된 작업을 엄청나게 괴로워해서 쓴 소네트가 남아있다. 그렇게 고생 끝에 완성한 그림을 보고 다들 경악하며 찬양하고 감탄했으며 경쟁자인 건축가 브라만테도 할 말을 잃었다고.

실물은 성당 천장에 그려져 있어서 바닥에서 고개를 꺾고 봐야 하고 관광객들과의 거리가 엄청나기 때문에 딱 신용카드 크기 정도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장함이 느껴진다. 그림 한장 한장은 작아 보이겠지만 그것들이 성당을 꽉꽉 채운 전체 크기는 굉장히 크기 때문에 한눈에 안 들어오더라도 일단 들어가는 순간 그 자체로 압도당한다. 보존도 잘 되어 있어서 세세한 부분도 잘 보인다. 2006년 기준으로 성당에서 유일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며, <천지창조>가 그려진 방에 들어가 당최 나올 생각을 않는 사람들 때문에 일정 시간마다 관광객들을 내보내고 뒷사람들을 받는다.

2014년 기준으로는 복원작업 후 작품보존을 위해 사진촬영을 엄금하고 있으며 가드 분들이 지속적으로 ‘No Photo’를 외치고 있다. 물론 찍으려면 몰래 못 찍을 것도 없겠지만, 만약 걸리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나중에 올 한국인들도 불이익을 당할 수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하도록 하자. 천지창조의 여러 장면들 가운데서도 하느님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락말락한 위 장면이 워낙에 유명한지라 여기저기에서 패러디 당하는 명화들이 많다. 그런데 아담의 손가락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원본이 아니라 카르네발리가 다시 그린 것이다. 천장화가 완성된 후 경당의 불안정한 기반 때문에 벽면에 균열이 발생했을 때 아담의 손가락이 파손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저 손가락 접촉은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흙으로 아담을 만든 다음 코로 숨을 불어넣어 생명체로 만들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 전까지 이 부분을 묘사한 다른 작품들에서는 말 그대로 하느님이 아담의 코 부분에 입술을 대고 숨을 불어 넣는 모습이었는데 마치 남자끼리 키스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람에 감상객들이 키득거리곤 했었는데, 이를 고려하여 간접적으로 바꾼 것이 저 손가락 부분이라고 한다.

미국 세인트존스 메디컬센터의 메시버거 박사는 이 아담의 창조에서 뇌의 단면도가 보인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대해 메시버거는 "아담이 하느님으로부터 지성을 부여받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 외에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의 교수들은 다른 그림에서도 뇌의 해부도가 보인다는 주장을 했으며 "교회 몰래 그림에 자신의 해부학적 성과를 기록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고 주장했다. 이것을 보고 일부 네티즌들은 "미켈란젤로가 하느님은 그저 사람의 뇌에서 만들어진 상상일 뿐이라고 비웃기 위해 그렸다"라고 추측한 적이 있었다. 뭐가 되었든 진실은 미켈란젤로만이 알고 있겠지만 만약 네티즌들의 추측이 맞았다면 그동안 교회는 신성모독의 정점을 찍은(...) 그림을 수백 년 동안 보존하고 있던 셈. 물론 이러한 네티즌들의 추측이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애초에 미켈란젤로 본인은 매우 금욕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아서 거룩한 사람으로 불렀으니까.

 

최후의 심판 : 1533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명으로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벽화로, 사코 디 로마를 비롯한 재난의 연속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1534년 교황의 선종으로 이 작업은 일단 중지되었으나 클레멘스 7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바오로 3세가 다시 이 작업을 의뢰함으로써 결국 1541년에 면적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림을 보고 추기경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그림에서 보았듯이 대부분의 인물이 나체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수의 모습이 기존의 성화와는 전혀 다르고,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등 과격한 묘사들로 가득 차 있다. 당연히 수많은 성직자들과 추기경들은 "이런 나체화는 성당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탄원했다.

그래도 이 그림을 인정한 바오로 3세 생전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바오로 3세가 선종한 이후 소집된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결국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의 인물에 옷을 그려 가리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볼테라에게는 현대까지도 '기저귀 그리는 화가'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 따라다닌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성화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나체화로 그려졌지만 그림 실력에는 타고나서, 더 이상 태클 거는 성직자들은 없었다. 그런데 당시 교황의 의전담당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은 누드화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고 '나체들은 거룩한 장소에 적절하지 못하며 홍등가에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혹평을 한다.

하지만 교황청이 자신을 후원해주고 있기에 이러한 혹평을 대놓고 표현하지 못했던 미켈란젤로는, 6년 반에 걸친 이 그림 제작 과정에서 복수한다. 4구역의 오른쪽 하단에 있는 카논의 배 부분에, 체세나 추기경을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로 그려 넣은 것이다. 미누스의 귀는 당나귀귀로 표현되었는데 당나귀의 귀는 무지하다. , 무뇌하다는 상징이고 성기마저 뱀이 물고 있게 그려, 인간의 성적 방종에 대한 하느님의 가혹한 심판을 보여준다.

이런 미켈란젤로의 장난질에 체세나 추기경은 화가 나서, 당시 교황인 바오로 3세에게 자신의 얼굴을 빼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그나마 수도복을 입고 무덤에서 나오는 영혼을 돌보는 천사로 자신을 표현했는데, 바오로 3세는 자신도 미켈란젤로의 심기를 건드려 작품 등을 통해 피해를 볼까봐, "체세나 추기경님이 연옥에만 계셨어도 제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사람인 제가 지옥에서 추기경님을 구원하기란 불가능합니다."라며 체세나 추기경을 버리고 발을 빼버린다.

축성식은 15411031. 일설에는 축성식 당일 성화를 본 바오로 3세가 무릎을 꿇고 "하느님, 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본인의 얼굴도 있다. 사도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살가죽의 얼굴이 미켈란젤로의 얼굴이다.

 

스위스 근위대 : 교황을 경호하는 부대. 흔히 용병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스위스는 19세기부터 용병업을 불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용병이 아닌 경찰에 가까우며 실제로 이탈리아 법규에서도 이들은 치안 경찰로 분류된다. 하지만 여전히 바티칸 내에서는 유일한 군대로 간주하고 있다. 화려한 의상 때문에 의장부대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도 실제 경호 임무를 수행하며, 따라서 사격 훈련이나 경호원 전술 및 호신술 교육을 받고 있다. 물론 각종 개인화기를 구비하고 있으며, 매년 사격대회에 나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현재 교황청의 근위대이며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오래된 군대이다. 그래서 바티칸에서 만큼은 정식명칭이 스위스 용병대에서 '교황청 근위대'로 명명된다.

교황청 근위병은 현재 135명이다. 근위병이 되려면 자격이 제법 까다롭다. 먼저 결혼하지 않은 스위스 남자 가톨릭 신자여야 하고 스위스군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나이는 19~30세 사이이며 고졸 이상 학력을 갖고 있어야 하며 도덕적,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물론 키가 174cm이상, 신체적으로 매우 건강한 자여야 한다.

새 근위병을 뽑으면 스위스 근위병의 저항 기념일인 매년 56일 교황에게 충성 서약식을 갖고 현장에 배치한다. 서약식을 할 때 언어는 근위대 신병이 살던 스위스 지역의 언어에 따라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중에서 고를 수 있다. 평소에 근무할 때는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아무리 고귀한 작품이라 해도 계속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쳐다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 눈에 담았으면 됐다. 밖으로 나왔다.

산 피에트로(영어 : 베드로) 광장에는 입장하기 위하여 줄을 선 행렬이 끝이 안 보인다. 성 피에트로 광장(이탈리아어 : Piazza San Pietro)은 로마 시의 보르고 리오네 구역과 동쪽으로 접경을 이루며, 최대 3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성 피에트로 광장의 설계자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이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설계하면서, 가톨릭교회가 그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고자 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머리로 두고, 반원형의 회랑 두 개를 팔로 묘사함으로써 성 베드로 대성전이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성 베드로 광장 양편에 각각 네 줄로 늘어선 토스카나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로 이루어진 베르니니의 회랑은 165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67년에 완공되었다. 16m 높이의 원기둥꼴 대리석 기둥 위에 있는 140개의 성인상은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조각한 것이다.

중앙에는 오벨리스크가 세워졌고, 양쪽 옆에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만든 화강암 분수 2개가 자리 잡고 있다. 베르니니는 분수가 타원의 초점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출구 근처에 있는 매점에 들어갔더니 가톨릭과 관련된 용품을 팔고 있었다. 묵주는 집에도 여러 개 있으니까 살 필요는 없고, A2 크기의 천지창조콜로세움사진을 구입했다. 내 방에 걸어놓고 볼 때마다 로마를 생각할거야~~

 

근처 중국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동남아나 중국으로 관광가면 들르는 그런 중국식당이었다. 그런데 원형식탁이 돌아가지 않는다. 가짜 중국 식당인가? 음식 나오는 것은 중국풍이 맞는데.... 역시 내 입에는 뭔가 부족하다. 계란을 푼 미역국도 영 간이 안 맞다. 밥을 조금만 퍼서 맛만 보고 나왔다.

 

오후에는 선택옵션으로 벤츠 승합차를 타고 로마시내를 관광하였다. 8명이 탑승하고 1인당 60유로를 주었으니까 오후 반나절 도는데 60만원 이상을 투자한 셈이다. 그러나 버스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길을 돌아다니려면 달리 대책이 없다. 우리 일행은 모두 신청한 것 같다.

 

판테온은 그리스어 판테이온(Πάνθειον)’에서 유래한 말로,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의 돔은 판테온의 돔을 모티브로 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Dome)은 원래 신전이었다. 과거에는 종교적, 현대에는 세속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사실 국회의사당의 국회의원의 '직무'가 신성하다고 생각한다면 과거로 따지면 신전에서 이뤄졌던 일을 국회의원들이 하고 있다는 의미로, 판테온에서 모티브를 한 국회의사당은 더 큰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117~125년에 지어진 판테온은 돔의 특징을 잘 살린 건축물이다. 오쿨루스(Oculus)라고 불리는 원형창이 돔 맨 위에 있는데 공기 압력을 계산해서 뚫렸기 때문에 비가 와도 건물 내부에 비가 내리지는 않는다. 판테온은 예전에 7명의 신전을 모셨던 곳으로 판테온 들어가는 입구 페디먼트에는 7명의 신이 새겨져있다.

내부 지름은 43.9m. 신성함을 의미하는 원의 형태로 지어졌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 돔 구조는 로마식에서 나타나던 큰 특징인데 판테온에 들어가면 격자무늬 크기의 구멍이 돔에 새겨져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는 네모난 구멍은 오쿨루스 쪽으로 가면서 상승효과를 느껴지게 한다.

 

트레비 분수는 로마에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분수이다. 높이는 25.9m, 너비는 19.8m이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는 예술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것은 오랜 전통으로 남아있다. 이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거나 언젠가 다시 로마에 오게 된다고 믿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오른손에 동전 세 개를 들고 왼쪽 어깨 너머로 던지면 행운이 온다는 말도 있다.

1453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명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1762년 교황 클레멘스 13세가 설계를 공모하여 니콜라 살비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재단장 하였고, 폴리궁전 앞에 분수를 설치한 형태이다. 해신 포세이돈을 중심으로 그 아래로는 말과 함께 두 개의 트리톤(포세이돈 아들) 상이 존재하고, 왼쪽은 격동의 바다를 오른쪽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한다.

트레비 분수는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지친 로마 병사들에게 물을 제공해준 처녀 설화가 담겨있는 처녀의 샘을 수원으로 하고 있다. 트레비 분수 위 트리톤상위에 서있는 네 명의 여인은 사계절을 상징하며 트리톤상 옆에 있는 두 명의 여인은 각각 건강과 풍요의 여신을 상징한다.

 

스페인 광장 : 이탈리에 로마에 웬 스페인? 이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과거 스페인광장 자리에 스페인대사관이 있어 그때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냥 영화 속 명소로 워낙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엄청 붐빈다. 주변에는 명품상점거리가 있지만 아침 일찍 방문하면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없어서 사진을 찍기도 좋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젤라또를 먹던 계단은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인기가 높다.

 

베네치아 광장은 로마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곳에 있다.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2세 기념관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광장처럼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잔디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로 길이 나 있어 지나갈 수 있게 해 놓았다. 비토리오 에마뉴엘레2세 기념관을 정 가운데에서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장소이다. 광장 바로 옆에는 한때 무솔리니의 집무실이었던 베네치아 궁전이 있다. 무솔리니는 베네치아 궁전의 테라스에서 군중을 베네치아 궁전에 있는 군중을 상대로 연설하기도 했다.

 

진실의 입 :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사실은 하수구 뚜껑...ㅋㅋㅋ 중세부터 내려오는 전설로는 조각의 입 부분 뚫린 구멍이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진실의 입이 손을 깨문다고 한다. 즉 진실을 심판하는 얼굴 조각상!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펙이 이 앞에서 장난을 치면서 명소가 됐다.

아침 일찍 가면 사람이 붐비지 않는다. 관광객끼리 서로 오버하며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벽에 붙어있는 그냥 부조상일 뿐인데 뭔가 표정이 귀엽다. 직접 말을 할 것만 같다. 근처 성당에는 진실의 입을 본 뜬 기념품도 판매하고 있다.

 

포로 로마노(포룸 로마눔)은 베네치아 광장과 콜로세움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로마의 중심부의 유적지이다. 고대 로마 시절 대부분의 도시에는 포룸(영어 포럼의 어원)이라고 불리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광장이 있었는데, 이 포룸 로마눔은 수도 로마에 개설된 최초의 포룸이며,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원로원 의사당과 신전 등 공공기구와 함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동쪽으로 가면 콜로세움에, 서쪽으로 가면 테베레 강에, 남쪽으로 가면 팔라티노 언덕에, 북쪽으로 가면 캄피돌리오 언덕에 이른다.

 

콜로세움70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80년에 건축이 끝나 100일 축제 기간 동안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개막식을 올렸다. 콜로세움은 높이 42.38m, 둘레 53203CM 등 경기장 내부의 길이 873m와 폭 2355m라는, 당시에 건립된 건축물 가운데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스)의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워졌다.

본래는 비공식 이름이었던 콜로세움(Colosseum)의 유래에 대해서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Colossus Neronis)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Colossale)와 어원이 같다는 설이 있는데 중세에는 그 자체가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를 보러 찾아드는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경기장은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2]

콜로세움은 608년까지는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지만 중세에는 군사적으로 이용되다가 그 이후에는 성당이나 궁전 등의 건축에 사용될 자재의 제공 터가 되었다.

 

벤즈 승합차를 타고 우리가 둘러본 관광지를 검색해보았다. 사진에는 찍혀있지만 인터넷 검색으로도 알아낼 수가 없는 곳도 제법 된다. 콜로세움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건축물이다. 2000년 전에 이런 구조물을 설계하고 시공을 해냈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 않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스며있을까? 우리나라에 이런 건축물이 없다는 것은 기술도 기술이거니와 그만큼 왕권이 백성의 인권을 존중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콜로세움을 두 바퀴나 돌면서 이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낸 로마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파리에서 합류했던 팀을 로마 공항으로 인도하여 한국으로 무사히 보내준 전혜영 가이드가 합류했다. 어제 저녁식사를 했던 금강산에서 오늘도 식사를 했다. 설렁탕이 준비되어 있어서 맛있게 먹었다. 이 정도 맛이면 아무런 걱정이 없겠건만....

모든 일정을 마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7시에 호텔로 들어갔다. 허허 이렇게 일찍(?) 들어오면 어쩌나?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가이드가 근처에 대형 마켓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대충 얘기만 듣고 나섰지만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된다. 한참 헤매다가 용인 줌마님 팀을 만나 마켓을 찾을 수 있었다.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 동네 슈퍼 비슷한 규모다. 별 구경할 것도 없어서 그냥 나왔다. 호텔로 오면서 이곳저곳 살펴보니 가죽을 취급하는 점포가 보였다. 점포 안에는 재봉틀과 가죽을 다루는 장비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주인은 진열된 물건들은 자기가 가죽을 들여와서 직접 만드는 수제품이라고 하면서 굵어진 엄지손가락을 보여주는 등 강한 자부심을 보이는 것이다. 벽에는 한국 아줌마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많이 붙여놓았다. 잘 됐네. 혁대를 하나 사야겠다. 가죽이 아주 부드러운 것으로 괜찮은 물건을 하나 골랐더니 구멍을 조절해주면서 계속 자기 자랑이다. 그러나 그 자랑질이 밉지 않아서 웃으며 받아주었다.

오늘이 이번 관광의 마지막 밤이구나. 남은 술은 가져갈 수 없으니 오늘 다 비워야겠네. 어제 읽던 책을 읽으면서 술도 홀짝홀짝 마시면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114()

오늘은 새벽 4시에 모닝콜이 들어왔고 5시에 버스를 타고 폼페이로 떠났다. 버스 타는 시간이 제법 길고 오후에는 공항으로 가야하지 때문에 서둘지 않을 수 없단다. 도시락을 하나씩 나누어 주는데 빵과 주스, 사과가 들어있었다. 폼페이로 가는 도중 휴게소에서 식사를 했다.

폼페이 가는 길목에 있는 항구가 나폴리라고 한다. 나폴리 해안으로 진입했다. 여기가 그렇게 아름답다는 나폴리 항인가? 내 눈에는 그저 그런 바닷가일 따름인데... 무슨 근거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라는 별칭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나폴리도 관광지로 이름이 높고,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 일정에는 없기 때문에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만 제법 남기고 폼페이로 향했다.

나롤리는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190떨어진 이탈리아 반도의 서해안(티레니아 해)에 자리 잡고 있다. 거대한 항구도시이자 지적 활동의 중심지이며, 전통적으로 빈곤한 메초조르노(이탈리아 남부지역)의 금융 중심지이다. 이곳은 한때 나폴리 왕국과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나폴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의 하나를 끼고 있으며, 이 만의 입구에는 북쪽으로 이스키아 섬과 남쪽으로 카프리 섬이 놓여 있다. 전통산업으로는 자기제품·직물·강철 생산이 있으며, 신흥산업으로는 전자공업·정유업·자동차조립공업이 있다. 관광업도 이 지방 경제에서 중요하다.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폼페이로 갔다. 폼페이는 산은 아닌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 평지보다 100m정도 높은 곳이라고 하면 되겠다. 이 곳이 5~6m 높이의 화산재에 덮여있었다고? 현재 상황으로 봐서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입장권을 사서 약 10m 정도의 터널을 통과하여 현장으로 들어갔다. 2,000년 전 로마의 도시형태가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사실 폼페이를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고대 로마인의 생활양식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도로와 인도를 상당히 넓게 조성해 놓았다. 도로는 마차가 많이 다녔는지 바퀴 자국이 움푹 패어있다. 상당히 넓은 신전도 있다. 제우스신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광장 중앙에는 말을 탄 장군의 동상도 있다. 벽화에는 희미하지만 당시의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있어야 하는 법. 식수를 끌어온 물길도 과학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공중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채광창이며 배연시설 등 상당히 발전된 기법을 여러 곳에 적용하여 운영한 흔적이 남아있다. 유적을 발굴하면서 나온 여러 가지 수확물들을 별도로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 대형 도자기와 토기, 여러 가지 도구와 연장 등등 많은 유물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쪼구려 앉은 사람과 개, 그리고 옆으로 누워있는 사람의 화석은 퍽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는 폼페이가 지나친 소비와 퇴폐적인 문화가 범람하여 신의 저주를 받아 화산이 폭발하고 용암과 화산재로 멸망하는 도시로 그려졌는데, 여기서는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798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분출물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 내렸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 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어버렸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당시 로마의 정치가 소()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서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소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다. 폭발 당일 소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소()플리니우스에게 알려주었다. ()플리니우스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재빨리 어머니와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의 숙부인 플리니우스는 당시 함대의 제독으로 군함을 타고 나가 구조 활동을 펼쳤지만 독성이 강한 화산 가스에 질식해 그만 죽고 말았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 티투스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4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4/5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나온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소렌토가 이번 서유럽 여행의 종착지다. 폼페이관광을 마치고 내려와서 소렌토로 가기 위하여 50년은 더 운행했을 것 같은 오래된 기차에 올랐다. 이 기차는 완행열차인가보다. 좌석을 비롯한 내부 시설이 모두 허접하다. 두어 정거장 지났을까. 송아지만한 개가 불쑥 들어오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지난번 버스타고 갈 때 들른 휴게소에서도 커다란 개를 데리고 들어와서 나를 식겁 시키더니... 여기는 개도 사람과 같은 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40분쯤 달려 소렌토에 도착했다. 역을 내려오니 도로변에 흉상이 하나 얹혀있다. 유명한 시인 타소라고 한다.

도로를 따라 시내로 들어섰다. 건물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절벽도로와 급경사를 이루며 설치된 계단이 나타난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계단이지만 저 계단을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데... 시간이 있어서 내려갔더라면 해변에 지어진 계단식 별장단지를 볼 수 있었겠다. 푸른 바다와 아기자기한 집이 빼곡하게 들어선 풍경이 절로 감탄을 자아내는 지상 낙원 포지타노. 포지타노는 중세부터 귀족들의 별장이 모여 있었던 곳으로 유명했으나, 19세기 중반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포지타노 주민의 절반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존스타인벡이 1953년 자신의 에세이에서 포지타노를 꿈의 장소로 소개해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타노광장을 중심으로 골목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골목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젤라또는 어디를 가나 인기 품목이다. ‘진짜가죽이라 적어놓은 가게도 있다. 한국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온다는 뜻이지. 광장에서는 제복을 입고 각종 악기를 장착한 고적대가 풍악을 울리며 행진한다. 도로 차단시설까지 한 것을 보니 큰 행사가 있나보다.

간단히 시내구경을 마치고 다시 기차를 탔다. 이번에는 젊은 친구가 타더니 아코디언으로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두곡을 연주한 뒤 모자를 들고 돌아다닌다.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이 제법 있다. 수금이 끝나니까 다음 칸으로 건너갔다.

소렌토(이탈리아어: Sorrento)는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현에 있는 코무네다. 치르쿰베수비아나(Circumvesuviana)라는 지방 철도선의 남동쪽 끝에 위치하여 폼페이나 나폴리로부터 가기도 쉬워 인기가 많은 관광지다. 돌아오라 소렌토로등의 나폴리 민요로 알려진 곳이다. 16세기 르네상스 문학 최후의 시인이라 불리는 소렌토 출신의 시인 토르콰토 타소의 기념비가 타소 광장에 있다. 포도주·올리브유 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소렌토라는 이름은 '시레나의 땅' 이라는 뜻의 '수렘툼'에서 유래했다. 시레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 사이렌을 뜻하는 말로, 소렌토의 절벽 위에 앉아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지나가는 뱃사람을 유혹해 바다에 빠져 죽게 만든 인물이다. 소렌토에서는 '돌아오라 소렌토로'카루소' 같은 명곡이 많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대표적으로 내세울 만한 역사적 유적지가 많진 않지만 푸르른 바다와 이를 바라볼 수 있는 광장, 공원 등이 많아 여유로운 시간을 맘껏 즐길 수 있다.

 

폼페이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탈리아 현지식은 대부분 빵과 스파게티다. 이것이 이탈리아 마지막 식사로구나. 그래도 맛이 있어야 먹지. 역시 반도 못 먹고 나왔다. 그런데 옆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30여명 되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인디고트레블이라는 여행사에 의뢰하여 왔다고 한다. 우리처럼 한꺼번에 인천공항에서 나온 게 아니고 개별적으로 나와서 어제 여기서 만난 사람도 있고, 오늘 합류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인디고트레블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더니 여기는 우리처럼 50~60대가 얼쩡거릴 곳이 아니었다. 외국 여행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로마공항으로 갔다. 버스를 타고 4시간쯤 걸렸나보다. 집으로 가는 길도 전혜영 가이드와 함께여서 마음이 놓인다. 예전에 베트남 골프여행 갔을 때 부치는 수화물의 용량이 초과되어 과태료를 무는데, 이리 가라 저기 가라하면서 뺑뺑이를 돌았던 기억이 난다. 말이 안 통하면 정말 답답하지. 가이드가 동행하는 여행상품은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다니까.

가이드가 챙겨준 전자항공권발행확인서한 장이면 만사 오케이다. 여권과 함께 제출하니 바로 좌석표가 발행되어 나온다. 아시아나 항공 1840분 발 OZ562기라고 적혀있다. 12G니까 역시 좌석도 복도 쪽이다. 그런데 비행기에 오르니 오늘은 좌석이 많이 남는다. 내 자리도 3개의 좌석 중에서 2개가 비어있어서 부담 없이 편하게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올 때 탄 비행기는 구식이었다. 휴대폰 충전 장치도 없을 뿐 아니라 모니터 화면도 적어서 보기 불편하였다. 영화 시청은 포기하고 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돼지고기와 빵이 제공되었는데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기내식은 정말 먹을 만하다. 역시 캔막걸리를 주문하여 맛있게 먹었다. 인천국제공항에는 오후 2시가 조금 지나서 도착하였다.

 

공항에 도착하면 수화물 찾기 바쁘다. 그리고 수화물을 찾는 순간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나도 가방이 나오자마자 마산가는 차표를 사기위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전혜영 가이드를 발견하고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같이 떠들면서 웃음을 나누던 용인 줌마 팀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줌마 팀뿐만 아니라 같이 돌아다녔던 우리 일행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내 가방이 너무 늦게 나왔나?

 

810일의 서유럽 4개국 관광일정을 무사히 끝냈다. 허리 디스크 때문에 관광에 차질이 생기면 어떡하나하고 걱정을 많이 했지만 별 문제없이 마무리하여 다행이다. 이번에 방문한 서유럽은 각 나라마다 10일씩 돌아다녀도 부족할 만큼 볼거리가 많은 국가다. ‘참좋은 여행사의 관광 상품을 살펴봐도 다양한 상품이 나와 있다. 결국 시간과 돈과 건강이다.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야 갈 수 있지. 흐트러진 몸 상태를 정비하여 다음 여행 때는 아무런 걱정 없이 떠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여행기간 내내 음식 조절은 성공한 것 같다. 입맛에 맞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적게 먹고 많이 걷다보니 체중은 전혀 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번 서유럽 관광은 기독교 문화에 기초한 대규모 성당과 박물관을 구경할 수 있었다. 특히 세계 3대 박물관을 두루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인간이 만들 유물보다 스위스의 융프라우 같은 자연의 웅대함이 내 마음을 더 끈다. 유적이건 대자연이건 이런 경험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중요 관광지에서는 무선 수신기를 사용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예전에 동남아나 중국에 가면 가이드가 소형 확성기를 들고 설명을 하였지. 그런 소음 공해에서 해방될 수 있어서 좋았다.

다음 여행 코스는 인도가 될 것 같다. 인도도 북인도, 남인도, 동서인도로 구분하여 상품이 나와 있다. 우선 북인도부터 섭렵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