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도 관광 7박9일
조 황 래
서유럽 관광을 다녀온 지 4달이 지나가자 허파에 바람 들어오는 소리가 솔솔 들린다. 이럴 때는 또 어디론가 다녀와야 안정이 되지.ㅎㅎㅎ 이번에는 이미선이 2008년 1월에 다녀온 북인도로 가볼까? 벌써 10년이 더 되었구나.
인도 관광은 호불호가 뚜렷이 갈린다고 한다. 인류 4대 문명중의 하나인 ‘인더스문명’이 발원한 곳이 인도이기에 찬란한 유적과 고고한 정신문화에 감탄하는 부류가 있고, 옛날의 영광을 뒤로한 채 낙후되고 지저분한 도시와 배회하는 빈자들의 허접한 모습에 혀를 내두르는 부류가 있다고 한다. 그래, 좋은 것은 가슴에 담고 허접한 것은 눈에 담아오면 되겠지 뭐.
내 컴퓨터에 등록된 여행사 몇 군데를 방문하여 패키지 상품을 점검해보니 이번에는 유명한 ‘타지마할 묘’가 포함된 북인도 7박9일 상품이 유력했다. 날짜와 조건들을 비교 검토하여 최종 ‘노랑풍선’ 여행사로 결정하였다. 이미선도 올해가 교장임기 마지막 해이기에 내년부터는 같이 여행을 다닐 테니까 내가 독방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올해까지는 독방사용료를 낼 수밖에 없다. 아깝지만 32만원을 추가로 송금했다.
일단 결정이 되고나면 준비물을 차근차근 챙기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먼저 여행용 가방부터 큰 것으로 새로 장만했다. 여태 사용하던 것은 너무 작아서 중형 가방을 하나 더하여 항상 두 개씩 밀고 다니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실 내가 인도방문을 살짝 망설였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식사 때문이다. 수년 전에 창원의 친한 친구와 인도 소고기요리를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거의 손도 대지 못했다. 요리에서 나오는 독특한 향이 내 입에 전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김과 멸치, 고추장, 장조림, 깻잎 등 밑반찬을 제법 챙기고 컵라면도 10개나 담았다. 상비약도 새로 챙기고 소주도 1.8리터 큰 것으로 한 병 넣었다.
인도는 4월부터 기온이 많이 오른다고 한다. 그럼 3월 하순은 어떨까? 마산은 아직 쌀쌀하고 오히려 추운 느낌이라 인천국제공항 갈 때까지는 겨울옷을 입어야하고, 비행기 탑승하고 나서는 봄옷으로 갈아입어야겠지. 인도에서는 오히려 여름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우기는 아니니까 방수가 되는 외피는 없어도 괜찮겠다.
down 받은 여행사의 스케즐에 따라 방문지에 대하여 사전검색을 해보았다. 여행사에서도 별도로 정보를 주겠지만 내가 직접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인도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하나하나 점검하다보니 A4 용지로 16페이지나 되었다. 출력하여 한 번 더 읽어보고 가방에 넣었다.
일정표를 보니 이번 여행은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아주 길다. 당연히 책을 많이 챙겨야지. 새 책을 구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기억을 되살리며 다시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 댄 브라운의 디지털 포트리스 1,2권, 디셉션 포인트 1,2권과 여러 가지 책을 챙겼다. 가방에 담으니 무게가 상당하다. 인도 국내선 비행기는 수화물이 15kg까지 무료라고 하던데....
여행갈 준비는 대충 다 되었다. 자, 떠나자~~~
3월 23일 (토)
인천국제공항 제2 터미널 노랑풍선 테이블에 10시까지 오라는 문자를 받았기 때문에 5시간 이상 소요되는 공항리무진버스 운행시간을 고려하면 4시 40분발 버스를 타야한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이미선의 배웅을 받으며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인천공항 행 버스에 올랐다. 이른 시간이라 탑승자는 달랑 3사람뿐이다. 심야버스는 회사 입장에서는 완전 적자운행이네... 그래도 평균적으로는 장사가 되는 것으로 믿자.
신탄진 휴게소에서 20분 정도 쉬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식사할 마음은 내키지 않아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 웬 탱크? ‘M110 8인치 자주포’와 ‘M48A2C 전차’ 실물을 배치해 놓았다. 고속도로 이용고객에 대한 볼거리 서비스 제공 및 안보의식 제고 차원에서 전시하게 되었단다.
9시 2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심야시간에 출발하여 도로정체가 없어서 그런지 30분이나 일찍 온 것이다. 노랑풍선 테이블에는 아직 직원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합실 이곳저곳 큰 가방을 밀고 다니면서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 후에 다시 노랑풍선 테이블에 가니 예쁘장한 아가씨가 맞아주었다. 이번 팀은 모두 8명이라고 한다. 단출하여 다니기 수월하겠지만 숫자가 적어서 너무 작은 버스가 배정되면 많이 불편할 텐데...
서류를 받아 대한항공 매표소에서 탑승권을 받고 큰 가방은 수화물로 보냈다. ‘KE481기 37B’ 좌석표를 받았다. 통로에 면해야 다리를 펼 수 있기에 나는 항상 창호 쪽보다 통로 쪽 좌석을 선호한다. 다행히 좌석이 남아있었네.
출국심사를 거쳐 출국장으로 나갔다. 매장의 크기와 규모, 특히 명품매장이 얼마나 입주해서 영업을 하는지가 터미널의 등급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234Gate 탑승구’를 찾아서 걸어가다 보니 내부시설도 정말 수준급 인테리어로 꾸며놓았다. ‘한국전통문화센터’ 앞에서는 아름다운 한복을 입은 두 명의 여인이 가야금과 아쟁을 연주하고 있었다. 국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10분 정도 아름다운 음률을 감상하였다. 인천공항은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아직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러보니 ‘평화국수’ 간판이 보인다. 식사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나도 들어가서 ‘떡만두칼국수곰탕’을 시켰더니 15분가량 기다려서야 나왔다. 국수나 칼국수가 맛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거리를 마다않고 가서 먹어 볼만큼 좋아하는데, 오늘은 가장 맛없는 칼국수를 가장 비싸게 먹은 날로 기록해야겠다. 이따위 칼국수를 15,000원이나 받다니...
13시 5분 이륙예정이라 30분 여유를 두고 12시 35분에 탑승구가 열렸다. 비행기에 올라 백팩을 상단 보관함에 넣고 자리를 잡으니 주변에 빈 좌석이 많았다. 내 옆 좌석도 비어있네. 조금 더 편안하게 갈 수 있겠구나.
비행기가 이륙하여 안정을 취하자 기내식이 나왔다. 국적기의 기내식은 정말 괜찮다.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는데, 생선이 들어간 것을 골랐더니 이건 조금 미흡했다. 스파게티가 들어있었는데 비쩍 마른 국수 같아서 먹기가 불편하구나. 스파게티만 제외하고 나머지 음식은 맛있게 먹었다.
낮 시간이라 잠은 오지 않고, 책을 읽으려니 자세가 너무 불안정하고... 영화나 보자. 대한항공에서 제공하는 영화에 좋은 프로가 제법 있다. 그 중에서 예전에 한 번 보았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한 ‘반지의 제왕’을 선택했다. 1부 ‘반지원정대’와 2부 ‘두 개의 탑’은 전부 다 보았고, 3부 ‘왕의 귀환’은 1시간 정도 보았을 때 인도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다는 방송이 나오는 바람에 모니터를 껐다. 영화를 7시간이나 보았네.
인도는 우리나라보다 3시간 반이 늦다. 간디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현지시간으로 오후 7시 5분. 내가 탄 비행기는 9시간 30분이나 하늘을 날았구나. 예정시간보다 30분이 늦었다.
백팩을 챙겨 등에 메고 비행기에서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 나라는 입국절차를 왜 이렇게 운영하는지 모르겠다. 사전에 비자발급 심사를 미리하면 왜 안 될까? 비자 심사하는 코너를 여러 군데로 나누어 놓아서 처음 오는 우리 같은 사람은 많이 당황스럽다. 줄을 두 번이나 옮겨서 겨우 심사에 통과했다. 그리고 뒤쪽으로 자리를 옮겨 발급비용 30$을 카드로 지불하고 영수증 지참하여 다시 줄을 서서 기다려야했다. 참말로~~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는 제도를 모방하여 따라하면 될 것을.... 수화물 찾아 밖으로 나오기까지 거의 1시간 반이나 소요된 것 같다.
밖으로 나와서야 우리 팀원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언뜻 보아도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노부부 한 팀, 50대 부부 한 팀, 친구인 것 같기도 하고 동료인 것 같기도 한 60대 중년 여인 두 사람, 그리고 남여 솔로 각 1명 이렇게 8명이다.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를 만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우리를 맞이한 차는 18인승 소형버스다. 수화물을 모두 싣고 버스가 출발하자 가이드는 자신의 이름이 ‘라씨 나라연 굽따’라고 소개한다. 얼굴에 착하고 순진한 상이 묻어나온다. 패키지여행에서 가이드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조금 심술궂은 친구를 만나면 여행기간 내내 서로 피곤하잖아. 이 가이드는 첫인상이 너무 좋아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01년에 한국에 와서 6개월간 어학연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우리말을 잘 하는 것 같다. 81년생이고 2013년에 결혼했단다. 올해 38살이구나.
공항에서 30분쯤 달렸을까. 첫 날을 묵을 ‘HOTEL PEARL OCEAN'에 도착하였다. 마당에서는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신랑이 말을 타고 입장하는 모습은 살짝 웃음을 자아낸다. 조금 구경하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 가이드로부터 124호 키를 받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호텔이지만 실내도 깨끗하고 내 방도 넓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그런데 욕실에 욕조가 없구나. 목욕은 못하고 샤워로 대신할 수밖에. 큰 가방에서 내일 일정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놓고 소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자리에 들었다.
24일 (일)
5시 반에 모닝콜이 들어왔다. 일어나서 세면과 간단한 화장을 하고 6시 반에 식당으로 갔다. 대체로 식당은 호텔의 규모에 비례한다. 여러 가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나는 토스트 2조각이면 충분하다. 계란 후라이와 주스를 한 잔 따라서 솔로로 오신 여자 분과 같이 식사를 했다.
7시 반까지 모이라고 했지만 나는 조금 일찍 가방을 챙겨서 내려왔다. 어제 밤 떠들썩하게 결혼식이 진행된 곳으로 가보니 상당히 넓은 잔디밭에 손님들이 앉았던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이 정도의 결혼식을 올린 사람은 여기서도 제법 부유한 층에 속하는 사람이겠지.
우리가 탈 버스의 전면 대형 유리창에 큰 글씨로 'TOURIST'가 적혀있다. 관광객용 모든 버스에는 이렇게 적어야하나 보다.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오늘은 ‘왕이 살던 땅’인 ‘만다와’로 간다. 만다와는 라자스탄州에 속한 작은 마을이다. 라씨 가이드는 6시간쯤 걸릴 것이라면서 인도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를 해 주었다.
* 인도 인구는 12억으로 중국 다음으로 많다. 29개 주(州)로 구성되어 있으며 16개 언어와 800개의 지방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 1857년부터 1947년까지 영국이 지배를 하였고, 우리와 같이 8월 15일 독립을 쟁취.
* 대부분 힌두교를 믿으며(83%) 이스람교를 믿는 사람도 제법 많다(12%). 이스람교도는 물소고기를 먹을 수 있단다. 지나교 2%, 시크교 2%, 불교는 0.5%밖에 안 된다고.
* 소가 죽으면 매장을 하는데 거리를 배회하는 소 중에는 임자 없는 소도 많단다. 개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도로에 개들이 엄청 활보하고 다닌다.
* 지방마다 복장과 음식이 다르지만 대체로 화려한 옷을 좋아한다.
* 인도의 세습적 계급 제도를 카스트라고 한다. 전통적인 법률서와 보편적인 용법 속에서 카스트는 대체로 4개의 계급으로 분류된다. 계급의 최상층은 브라만(승려), 다음은 크샤트리아(귀족, 무사), 다음은 바이샤(농민, 상인, 연예인), 최하층은 수드라(수공업자, 하인, 청소부)이다. 계급에 따라 결혼, 직업, 식사 따위의 일상생활에 엄중한 규제가 있다.
* 대통령과 총리는 임기가 5년으로 4월에 총선을 치른다고.
* 인도의 국화는 연꽃.
* 산이 별로 없고 평지가 넓다. 남인도에서는 3모작도 가능하고, 북인도는 2모작하고 있다.
* 문맹률이 40%에 달하지만 의무교육제도는 아직 실시되지 않고 있다.
* 대가족 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군대는 직업군인 제도를 도입하였다.
* GNP는 1,000$ 수준으로 4,000$은 되어야 그런대로 생활이 유지가 되는데... 직장인의 월급은 대체로 400$부터 시작. 일용직 근로자는 일당 10$ 수준.
* 인도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을 29개 보유하고 있는데 북인도에 12개가 있다.
* 우유는 1리터에 60루피로 약 1$.
두 시간을 달려 이름 모를 주유소에서 볼일을 보며 잠시 휴식을 취했는데, 30분쯤 더 가서 그럴듯한 휴게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면 아까 주유소에는 왜 갔을까? 이리로 바로 와도 괜찮았을 텐데.... 휴게소는 식당과 매점을 겸하고 있었다. 매점은 기념품, 옷가지, 장식품 등을 진열해 놓았는데 살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판매원도 보이지 않았다.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왔다.
일반도로를 달리다가 사람들이 많은 시가지를 통과할 때면 차들이 마구잡이로 누르는 크락숀 소리에 귀가 아프다. 화물차 뒤편에는 ‘스피드 40, Horn'이라고 적혀있다. ‘추월하려면 경적을 울려라’는 얘기다. 여기 문화가 이럴진대 할 말이 없다.
이 차가 달려온 길이 고속도로라고 한다. 뭔 말이여? 개나 소나 오토바이가 다니는 길이 고속도로라고? ㅎㅎ 그냥 웃자. 도로에 매표소를 만들어서 지나가는 차마다 통행료는 받는 것은 중국에서도 본 것 같은데.... 가끔 비포장 구간이 있어서 덜커덩거렸다.
예상대로 6시간을 달려 만다라 UDAIVILAS HOTEL에 도착했다. 호텔은 2층으로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전면에 넓은 잔디밭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111호를 배정받아서 숙소에 가방을 옮겨놓고 식당으로 갔다. 점심식사는 근처에 변변한 식당이 없기 때문에 호텔에서 식사를 한단다. 인도 현지식 식사를 해야 하는데.... 조그만 그릇에 붉은 스프가 나왔다. 맛을 보니 내가 소화시킬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닭고기 요리도 너무 태웠는지 시커멓게 그슬려서 먹기 흉하다. 인도 음식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카레도 ‘오뚜기 카레’로 길들여진 내 입에는 별로다. 오이와 토마토를 얇게 쓸어서 쟁반에 담은 것과 감자요리만 입에 맞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얇은 밀가루 빵과 같이 먹었다. 앞으로 현지식은 이와 유사할 텐데~~ 정말 예삿일이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관광에 나섰다. 어느 작은 마을로 갔는데 200년 전에 지어진 주택이라고 한다. 안내를 받아 제법 규모가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벽체는 화려하고 섬세한 벽화가 그려져 있고 방은 큰 사진액자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다른 방에는 여러 나라의 다양한 조각품, 장식품, 생활용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중국인과 거래하면서 자본을 형성한 상인들의 집이라고 한다. 그 후손들이 직접 살고 있는 집도 있단다. 그러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담장은 살짝 힘만 가해도 엎어질듯 불안하게 보였고, 집 전체가 너무 오래되어 낡았다는 인상이 짙었다. 유럽의 고궁이나 조금 오래된 집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비하여 여기는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다른 집으로 들어갔다. 여행사 안내서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가득한 저택 및 시골마을’이라고 소개해 놓았지만, 오래된 벽화나 천정화 등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낡아서 흉가에 들어서는 기분이었다고 하면 너무 심한 평가가 되려나? 비가 적은 지역이라 망정이지 강우량이 많은 지역이었더라면 벌써 무너졌겠다. 가이드 설명으로 이 지역은 새롭게 부상하는 관광단지라고 하는데, 이런 수준으로 관광객들에게 어필하기는 쉽지 않겠다.
‘만다와 성’은 지금 호텔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개인 사유지라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구경만 했다. 별 의미 없는 코스다. 개인 소유라 하더라도 관광 상품의 가치가 있다면 내부를 보여주도록 상품설계를 했어야지....
호텔로 돌아와서 1시간가량 휴식을 취한다음 ‘낙타 사파리’에 나섰다. 사파리(Safari)의 사전적인 의미는 자연 공원에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야생 동물을 구경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낙타 사파리’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지? 의구심을 가득 안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 밖에는 소 대신 낙타가 끌도록 되어있는 달구지 두 대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낙타 달구지를 타고 한 바퀴 도는 것이 소위 ‘낙타 사파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름에 속았구나.
달구지에 4명씩 올랐다. 소나 말 등 동물들이 다 그렇지만 낙타도 가까이 있으면 냄새가 심하다. 남자들이 앞줄에 앉고 여자는 뒤에 앉아 투어를 시작했다. 멋진 공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동네로 들어간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초가집 같은 창고도 보였다. 군데군데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모아놓은 더미도 보였지만 썩 멋진 광경은 아니었다. 마을을 벗어나 들판을 지날 때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분위기를 살짝 띄워주었다. 가방에 넣어갔던 소주를 꺼내어 한 모금씩 마시면서 기분을 냈다. 그래도 인도에서 낙타가 끄는 달구지를 타보았다는데 의의를 두자. 1시간가량 탔나보다. 내릴 때는 팁으로 1달러씩 주어야했다.
호텔에서 점심과 비슷한 메뉴의 저녁식사를 했다. 나는 먹는 둥 마는 둥 하였지만 나머지 분들은 대체로 잘 드신다. 정말이지 나만 적응을 못하는 것 같다. 각오하고 왔으니까 낙심할 필요는 없고, 입에 안 맞으면 맞는 것만 골라 먹으면 되지. 부족하면 컵라면으로 보충하면 되고. 식사를 마치고 괜찮은 분은 내 방으로 오시라고 했더니 여성 세 분은 피곤한지 오지 않고 부부 두 팀만 오셔서 5명이 상견례(?)를 했다. 노부부께서는 친구들께 알리지도 않고 인도로 오셨단다. 본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 걱정을 하셨지만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정정하시다. 83세에 비행기는 타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뭐. 사모님은 76세로 나와 띠 동갑이다. 젊은 부부는 57세와 54세. 농협에 다닌다고 했다. 우리는 직장생활해도 휴가철이 아니면 외국에 나가기 쉽지 않았는데...ㅎㅎ
1시간 남짓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3월 25일 (월)
6시에 모닝콜이 들어왔다. 혼자이고 꾸밀 것도 없으니까 30분쯤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나도 된다. 시골 호텔이라 공기도 좋고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도 참 좋다. 상큼한 아침이다. 이 호텔에도 마당에 제법 넓은 수영장이 갖추어져 있었다. 지금은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물이 지저분하지만 좀 더 더워지면 사용하겠지. 식당에는 우리 팀뿐이다. 이 호텔에 묵은 사람이 우리 외에는 없었다는 말이지. 지금이 관광 비수기라 그런가보다. 빵에 잼을 발라 주스와 같이 먹었다. 계란과 바나나도 하나씩 먹었다. 조금씩 먹는 습관이 들어서 그 정도만 먹어도 충분하다.
이번 여행에서 선택 관광은 3가지로 ‘아바네리 쿤다 우물관광’이 20$, ‘나하르가르 포트 일몰 + 맥주’가 30$, ‘칼라그리띠 쇼’가 50& 이다. 그리고 팀원이 8명인 관계로 가이드 팁이 1인당 160$이며 기타 잡비 10$로 모두 270$이다. 그리 부담이 되는 돈은 아니어서 모두 참여하기로 했고 각자 270$을 가이드에게 지급했다.
오늘은 ‘자이푸르’로 이동한다. 버스로 4시간쯤 걸리는 거리다. 8시에 체크아웃하고 출발했다. 오늘도 가이드는 인도의 얘기를 해 주었다.
* 휘발유는 리터당 1,000원 정도로 비싼 편이다.
* 학교는 5(초등학교) + 3(중학교) + 2(고등학교) + 2(중간대학) + 3(대학) 과정으로 운영.
* 뭄바이(봄베이) > 캘커타 > 뉴델리 : 인도의 3대 도시
* 노벨상 수상자 9명 배출
* 500루피와 1000루피는 파키스탄에서 만든 가짜 돈의 유입으로 사용금지.
가이드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도 자동차 경적 소리로 귀가 멍할 지경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1시간 반쯤 달리니 기사 식사시간이라고 휴게소에 들어간다. 휴게소 매장의 진열상품은 어제 보았던 것과 비슷하다. 코끼리조각이 가장 많은 것 같다. 우리 집 신발장 위에 있는 돌로 만든 주먹만 한 코끼리도 이미선이 인도에서 구입한 것인가? 글쎄~~
11시 40분쯤 자이푸르의 CYGNETT INN HOTEL에 도착했다. 4시간이 채 안 걸렸구나. 호텔이 규모도 작지만 시내에 위치해서 버스가 진입하는데 너무 혼잡스러웠다. 107호 열쇠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그런대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괜찮았다.
가방을 들여놓고 오후 관광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식당 메뉴는 여기서도 똑같다. 반찬 나오는 것 보고는 그냥 올라와서 컵라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인도의 사막지대인 라자스탄 주는 한 때 작은 제후 국가들이 밀집해 있던 곳으로 ‘왕이 사는 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요새나 궁전들 가운데는 아직도 봉건시대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주도(州都)인 자이푸르(Jaipur)시는 지배자와 집안사람들이 소유하던 요새였는데, 이 도시의 언덕 위 요새 세 곳과 여러 개의 궁전들은 중요한 관광지가 되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분홍색의 계획도시이며 도시 전체가 분홍색으로 치장되어 있어 ‘핑크시티’로 불리어진다.
자이푸르 중앙박물관 (앨버트 홀) 구경을 갔다.
웅장한 19세기 건물의 아치와 돔 아래 방대한 규모의 소장품이 전시된 자이푸르 중앙 박물관.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보관된 이곳에는 수천 점에 달하는 보석, 도자기, 금속 조각, 크리스털 작품, 무기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곳은 앨버트 홀 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시절에 인도를 방문한 에드워드 7세를 기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금속관에서는 정교하게 제작된 청동 그릇, 은주전자와 금 접시 등을 볼 수 있고, 무기관에는 전쟁 용도로 제작된 단도, 칼과 갑옷용 장갑 같은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조각관에서는 여러 신과 통치자들을 묘사한 조각 작품을, 국제미술관에서는 일본의 작은 조각상, 미얀마의 은제품, 기원전 322년 이집트 투투의 미라화된 유물 등이 있다. 보석관에는 19세기 시대 자이푸르 여성들이 일상의 삶에서 사용했던 반지, 팔찌, 귀걸이, 머리핀이 진열되어 있다. 그런데 왜 카메라사진을 못 찍게 하지? 건물외관만 카메라에 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많은 사진들이 실려 있잖아~~ 전부 휴대폰 사진인가? 야경이 훨씬 멋지네. 비둘기는 왜 이리 많지? 박물관에 오는 사람들이 먹을 것을 많이 주나보다.
다음으로 ‘하와마할’을 구경하러 갔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5층의 붉은색 벽돌건물이다. 버스를 주차하기도 쉽지 않구나. 잠시 정차하여 우리가 재빨리 내린 다음 버스를 보내고 우리는 도로변에서 하와마할을 감상했다.
'바람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자이푸르 시내에 있는 왕궁 건물이다. 외부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왕실 여인들을 위해 바깥쪽에서는 안쪽을 볼 수 없지만, 안쪽에서는 바깥쪽을 관찰할 수 있는 테라스 구조로 만들어져있다. 벌집을 연상시키는 격자형 창문 900여개로 외장을 장식했다. 이름 그대로 바람이 잘 통하는 구조라고 한다. 라지푸트 양식과 이슬람 양식이 적절히 조화되어 있다. 그런데 일반상가건물과 쭉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까지 왕궁인지 애매하다. 왕궁의 일부를 호텔이나 상가로 변경한 것일까? 글쎄~~
다음은 ‘잔타르 만타르’를 보러갔다. ‘하와마할’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지척거리에 있었다. 길 양쪽에는 온갖 물건들을 파는 잡화점이 즐비했다. 가이드는 조그만 입간판을 세워놓고 앉아있는 여인에게 가서 뭐라고 하더니 모두 소매를 걷어 올리라고 한다. 나는 여름셔츠를 입었으니 걷어 올릴 것도 없다. 제일 먼저 자리에 앉아서 팔을 내밀더니 불과 2,3분 만에 ‘전갈’을 그려주는 것이 아닌가. ‘헤나문신’을 팔에 새긴 것이다. 가느다란 붓에 갈색 헤나를 묻혀서 그림을 그리고, 30분 정도 지나서 헤나가 마르면 문신이 완성된다. 이 문신은 1주일 정도 지나면 저절로 사라진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서 카톡으로 우리 가족에게도 자랑했다. 우리 일행 모두 팔이나 다리에 헤나문신을 하는 이색적인 체험을 즐겼다.
1734년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자이 싱 2세는 많은 과학자들의 외국 유학을 지원했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과학자들은 델리, 우짜인, 바라나시, 마투라, 자이푸르에 천문대를 건설했다. ‘잔타르 만타르’는 당시 세워진 천문대 중 하나로 인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마법의 장치’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천문대와 적도 시계, 해시계 등 16개의 천체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건축물을 땅에 고정해 맨눈으로 천문학적 위치를 관찰할 수 있도록 설계했고, 이를 통해 시각, 천체 높이, 일식과 월식, 행성의 기울기 등을 예측하거나 별자리의 위치를 보는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다. 1940년대까지 실제로 사용되던 이곳의 해시계는 현재 인공위성으로 관측하는 시간과 단 20초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눈으로 천체를 관찰할 수 있게 설계한 잔타르 만타르는 건축방식과 관측기구를 재현하는데 몇 가지 혁신을 이룩하였다. 이는 인도 역사에 길이 남을 천문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종합체이자 가장 보존이 잘된 유산이다. 잔타르 만타르는 무굴 제국 말기에 학문을 사랑한 군주가 있던 궁정에서 보유한 천문학 기술과 우주론의 개념을 잘 보여준다.
가장 큰 장비는 높이 30m의 ‘삼랏 얀트라’라는 거대한 구조물인데, 그림자가 가르치는 눈금을 읽으면 현재의 시각을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03년도에 한국과 인도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는데, ‘첨성대’와 ‘삼랏 얀트라’가 인쇄되어 있었다.
잠시 틈을 내어 보석공장으로 갔다. 안내인이 입구에서 원석을 보여주면 설명을 해주었지만 나는 보석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지나쳤다. 내부 매장에는 예쁜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 많은 보석이 있었지만 우리 팀원들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암베르 성’으로 갔다. 우리 전용 버스로 가다가 주차장에서 내려 지프로 갈아타야 했다. 도로가 좁아서 작은 차들만 오를 수 있도록 한 모양이다. 암베르 성은 바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형을 활용한 방어적 목적이 강한 성이다.
자이푸르에서 11km 떨어진 이곳에 1037년에서 1726년에 이르기까지, 7백 년 동안 카츠츠와하 왕조의 수도였던 암베르성은 무굴의 황제 악바르와의 혼인으로 왕국을 유지 시켜 온 '마하라자 만 싱'이 라지푸트 양식을 통하여 천연 색소와 재료를 이용하여 채색 한 것으로 다른 성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화려하게 장식한 성이다. 암베르 성의 채색기법은 아직까지 복원이 어려운 기술로 지금의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유지 시키는 것이 유일한 보존법이라고 한다.
언덕 위에 위치한 성으로, 성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코끼리를 이용하여 성 입구에 도착한다.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여기저기에는 누각이 많으며, 계단을 올라가게 되면 ‘디와니암’이라는 공공 접견실이 나온다. 이 디와니암을 통과하면 가네쉬폴이 나오고 이 가네쉬폴을 지나면 궁전의 마당이 나오는데 이 무굴양식의 정원을 따라서 여러 가지의 건축적인 장식들이 나타난다. 그 중의 하나가 수크니와스와 자이만디르 등이며 그 뒤로 만싱의 12부인이 사용했던 방으로 알려져 있는 12개의 방이 나타난다. 왕과 여왕이 머물던 전체가 거울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밝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아름다운 궁전 쉬즈마할도 잘 알려진 곳이다. 마하라자 만 싱이 무굴 황제의 시샘을 두려워 할 정도로 아름답게 가꾸어진 이 성은 보기에 아름다울 뿐 아니라 현대에 와서 복원이 어려울 정도의 채색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 건축학적, 미술학적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가 있는 곳이다.
사실 인도에 대해서 고등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잠시 배운 것 외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세계 4대 문명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이 인도에서 발생했다는 것과 ‘불교의 발원지’라는 정도. 그러나 암베르 성을 둘러보는 동안 마음이 찹찹하다. 왕들은 왜 이렇게 호화로운 궁전을 지어야만 했을까? 이렇게 높은 곳에 이런 성을 짓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었을까?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비단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산재한 명소들은 대부분 민초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였다.
암베르 성에서 내려와서 지프를 타고 제법 한참을 달렸다. 선택 관광중의 하나인 ‘나하르가르 포트’로 가서 맥주를 마시며 석양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이다. 건물 옥상 같은 곳에 원형 테이블과 허접한 의자가 놓여있었다. 우리 팀이 자리를 잡자 맥주와 땅콩 안주가 나왔다. 맥주도 못 마시는 분들에게는 콜라가 제공되었다.
1734년에 지어진 이 성의 원래 이름은 수다르샹가르(Sudarshangarh)였지만 죽은 왕자 나하르싱(Nahar Singh)의 유령이 이곳에 자주 나타나서 그의 이름을 따라 나하르가르(호랑이의 집)로 바뀌었단다. 1944년까지 잔타르 만타르의 해시계에 따라 시간을 알리는 대포를 쏘던 곳이기도 하다. 도시전체가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경관과 일몰이 제법 멋지다. 하늘은 미세먼지 때문인지 깨끗하지 않고 전체가 뿌옇게 보이는 아쉬움이 있었다.
호텔로 오는 길에 카페트 공장에 들렀다. 아이고, 카메라 배터리가 다 소진되는 바람에 사진촬영은 안 되었구나. 사진을 봐야 스토리가 생각나는데...ㅎㅎ 실크로 만든 제품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인도의 상징 코끼리가 그려진 넥타이를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두 개를 샀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쩌지?
호텔로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했다. 별로 먹을 것이 없어서 먹는 시늉만 내고 숙소로 와서 컵라면으로 배를 채웠다. 오전에는 버스를 탔고, 오후에는 내내 걸어 다니면서 구경을 하느라 체력이 많이 방전되었다. 일찍 샤워를 하고 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5시 기상, 6시 식사, 7시 출발이라고 한다.
3월 26일 (화)
아침 식당에는 사람들이 제법 북적거린다. 한국 사람들도 많이 있네. 간단히 빵과 계란, 주스로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아그라’로 이동한다. 버스로 약 5시간 소요된다고 한다. 체크아웃 마치고 7시에 출발했다. 가이드가 오늘은 인도의 공휴일에 대하여 얘기를 해 준다.
1월 14일 - 태양신의 날
1월 26일 - 인도 공화국의 날
2월 14일 - 시바신의 생일
3월 22일 - 색색의 물을 뿌리는 축제일 (홀리)
4월 4일 - 힌두인들의 새해
5월 17일 - 석가탄신일 등등
두 시간쯤 달렸을까. 거대우물 ‘아바네리 쿤다’에 다 왔다고 한다.
아바네리(Abaneri)는 지역이름이고 쿤다(Kunda)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인도 서쪽은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에 항상 물이 부족하고 귀했다. 그래서 왕이 백성을 위하여 우물을 만들어 주었는데, 물의 양은 자연히 많을 때도 있지만 없을 때도 있기 때문에 사면을 모두 계단 형식으로 만들어 누구든지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 거대한 우물은 1200년 전에 만들었다고 한다. 위가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역 피라미드 형식으로 물이 잘 모이게끔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목욕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건물의 위쪽은 사원으로 신전을 모셔놓았고 그 아래 돌출된 공간 좌우로 남녀의 목욕공간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신전의 벽과 기둥에는 정교하고 세밀한 조각을 많이 새겨놓았다. 우물의 깊이는 19.5m, 계단은 모두 3,500개나 된다고 한다. 현지의 사진사가 보여주는 사진에는 비가 많이 올 때 물고랑으로 물이 쏟아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물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조그만 트럭에 톱니바퀴가 달린 장비를 싣고 뭔가를 갈고 있었다. 사탕수수를 갈아서 즙을 낸다고 한다. 가이드가 한 컵씩 마시게 하였는데 단맛이 나며 먹을 만했다.
1시간을 더 달려서 휴게소에 도착했다. 도로변에 있는 휴게소는 파는 물건도 그렇고 시설도 그렇고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여기는 그래도 파는 물건의 종류가 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들도 사서 집에 가지고 가면 대부분 짐이 된다. 수시로 먼지도 털어줘야 하니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안 사야지~~
오후 1시 20분에 THE RETREAT HOTEL에 도착했다. 호텔이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어도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1층의 005호 방을 배정받아 가방을 들여놓고 바로 식당으로 내려왔다. 식당이 제법 넓고 시설도 괜찮아보였다. 처음으로 감자요리가 반찬에 등장했다. 여기에는 향이 들어있지 않아서 내가 먹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구나. 밥을 조금 담아서 김과 멸치, 장조림, 고추장과 같이 맛있게 먹었다.
타지마할로 갔다.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준비된 셔틀버스로 갈아탔다. 셔틀버스는 매연이 없는 전기차인 것 같다. 환경오염에 대한 대처가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구나.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는데 여자와 남자는 줄을 달리 서서 들어가야 하고, 소지품 검사도 받아야 한다. 절차가 꽤 복잡하구먼~~
들어가는 대문격인 건물도 매우 멋지고 화려하다. 앞에서 사진부터 찍기 시작했다. 이 건물을 지나자 사진으로만 봤던 타지마할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완벽한 대칭구조의 순백색 건물은 너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선의 사진에는 타지마할을 손가락으로 집는 것 같은 포즈로 찍은 사진이 있어서 나도 따라해 보았다. 그리고 타지마할을 손바닥으로 감싸는 포즈도 취해보았다.
외부에서는 보이는 모든 것이 완벽한 대칭으로 되어 있다.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게 만들었을까?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는 단순하다. ‘샤 자한’ 황제가 끔찍이도 사랑한 ‘뭄타즈 마할’ 황후의 관만 옥으로 만든 울타리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시되어 있는 무덤은 상징물이고 진짜무덤은 지하에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모습으로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실내장식도 너무 깨끗하고 화려하고 또 소박하다. 인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유적지를 배경으로 사진도 많이 찍으며 제법 오랜 시간 머물렀다.
타지마할은 인도 아그라에 소재한 일종의 대영묘. 인도의 대표적 랜드마크이며 인도 건축 예술의 위대한 유산이다. 당연히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건축 책임자는 페르시아 출신의 Ahmad Lahori로 알려져 있다.
단순히 규모라든가 들이부은 예산 측면에서는 다른 건축물도 대단한 것이 많지만, 이처럼 완벽한 비율과 좌우대칭으로 보이는 조형미, 주변 경관과의 배치, 빛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외관과 어우러져 해가 뜨고 짐에 따라 그 자태가 변하는 건축물은 흔치 않다. 무엇보다 오늘날 보기에도 감탄이 나오는 이런 건축물이 17세기 당시 기술로 22년 만에 완공되었다는 것은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이 단지 한 황제의 순애보적 집념만으로 그 당대에 착공하여 완성까지 봤다는 점에서 비하인드 에피소드 역시 누누이 회자되는 건물이기도 하다.
특히 다른 거대 유적에서 느껴지는 중압감이나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정갈한 맛이 이 건물이 진정 칭송받는 이유다. 오히려 잡스런 기교보다는 비례를 중시한 담백미 때문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으로 회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세속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텃세 강한 다른 유적지들과 달리, 타지마할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방문하는 무수한 방문객들이 발을 들여놓는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타지마할의 건설을 주도한 ‘샤 자한’은 17세기 초 재위한 무굴 제국의 5대 황제로, 당시 제국의 국력은 악바르 대제와 자한기르의 치세를 거치며 가히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선대들에 비해 샤 자한은 정복보다 예술을 애호하는 문화 군주로서의 측면이 강했고 또한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관용적이었다. 그의 치세 중에 제국은 번영과 안정을 누렸고, 반란은 속속 진압되었으며 시민들은 평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아내가 죽기 전까지는.
무지막지한 애처가이기도 했던 샤 자한은 그가 털끝만큼의 오점도 없다고 칭송한 황후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황후가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자 큰 비통에 잠겼다. 그리고 그로 인한 실의를 장엄하기 짝이 없는 묘역을 조성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했다. 그는 곧장 제국 전역에서 막대한 세금과 인력을 징발해 당시까지 쌓아올려진 인도 건축 예술의 포텐셜을 한데 집중하도록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타지마할의 건축 배경이다.
타지마할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페르시아 건축물의 느낌이 나는 이슬람 양식이다. 하지만 인도 고유의 아름다움이 더해져서 독특함을 풍긴다. 타지마할의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남북으로 기다란 분수 정원이 순례객을 반겨준다. 정원을 지나면 하얀색의 대리석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가운데의 돔과 네 개의 돔, 역시 네 개의 원형 첨탑(미나레트)이 네 방향으로 솟아 있는 것이 보인다.
건물 입구의 둥근 모양은 이슬람의 모스크 양식으로,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형형색색의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다. 하얀색 대리석은 인도의 마캄 지방, 흑색 대리석은 남인도, 녹색 대리석은 남아프리카와 러시아에서 각각 가져와서 사용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세계가 한곳에 모인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정문과 내부 벽면은 대리석 바탕에 연꽃, 재스민, 장미 꽃 문양에 옥과 루비, 진주, 산호 등의 보석을 박아 화려하고도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제국의 수도 아그라에 타지마할이 축조된 22년 동안, 페르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기술자와 장인들을 초빙했고, 이웃한 미얀마는 물론이고 멀리 중국과 오스만 제국, 이집트에서까지 온갖 건축자재가 수송되었다. 제국의 재정 상태가 휘청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이 건물은 실용성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순수한 예술 건축물이었다. 오늘날이야 관광객이 몰려들어 수입을 내고 있을 뿐, 당시로서는 생산성이 전혀 없는 건물을 위해 제국의 국력이 소진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백성들은 이것 짓고 유지비 댄다고 죽어났다. 신하들도 보다 못해 반대했지만 샤 자한은 그런 신하들을 힘으로 억눌러버리고 강행했다.
만약 그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다면 중도에 폐건물 꼴로 남아버렸을 가능성도 높지만, 다행이랄지 어떨지 그는 22년의 준공기간 내내 재위했음은 물론이고 완공된 1648년에서 10년이나 더 오래 재위한 장수 군주였다. 아마 폐위되지 않았으면 더더욱 오래 재위했겠지만, 끝내 아들 아우랑제브가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려 아그라 요새 탑에 가두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타지마할의 무리한 축조 탓에 세금을 각출당한 시민의 불만도 굉장했던 터이니 자업자득적인 면도 없지는 않았다. 특히 샤 자한은 정사에는 무관심한 암군이 되었던 터라 폐위 당했을 때 무굴 제국에서는 폐위에 불만을 품은 반란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우랑제브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들도 암군이 된 아버지에게 진절머리가 난 터라 굳이 아우랑제브가 아니더라도 다른 자식들에게 폐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탑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위대한 건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1666년 겨울까지 갇혀있다 죽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 주지 않았지만, 샤 자한의 유해는 뭄타즈 마할과 마찬가지로 타지마할에 공동 안장하였다. 이후 아그라 요새 지하에서 타지마할과 연결되는 통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최소한의 배려였다는 설이 있다.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그라 성’으로 갔다.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과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두고 2.5km 떨어져 있다. 아그라 성에서 타지마할이 바로 보이는 것이다. 아!! 이 성에 타지마할을 건설한 ‘샤 자한’ 황제가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한 곳이구나. 황제는 바로 눈앞의 타지마할을 보면서 얼마나 애통해 했을까. 붉은 사암의 성채와 내부의 하얀 대리석 건물이 어우러져 웅장함과 정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다. 특히 돌을 다루는 솜씨는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통로바닥 일부에 흰색 대리석을 깔았는데 그 정교함이 지금 건축기술로도 불가능 할 것 같다.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우리도 사진을 많이 찍었다. 아그라 성은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력한 설에 따르면 1565년 무굴제국 3대 황제 악바르 대제 때 공사를 시작하여 일일 4천명의 인부를 투입하여 8년 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전체 380,000㎡넓이의 부지에 총 2.5km가 넘는 높이 16~33m의 견고한 붉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본래 방어시설로 출발했던 만큼 견고한 성벽과 해자, 누벽 등 당대 최고 수준의 방서 시설들이 여전히 건재하다.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을 축조하면서 너무 많은 재정을 낭비한 샤 자한이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한데 샤 자한은 야무나 강 너머의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에 갇혀 있다가 끝내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대리석으로 만든 공예품 판매점으로 갔다. 매장 입구에 돌을 다루는 석공이 작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멋진 공예품들이 즐비하였지만 위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구매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선택옵션 프로인 ‘깔라까르티 민속쇼’를 보러갔다. 타지마할 모형이 나타나면서 쇼가 시작되었다. 샤 자한 황제와 뭄타즈 마할 황후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인데, 극장 규모가 너무 작아서 많이 실망했다. 화려한 무대 장치와 조명 아래 현란한 춤사위를 보이며 등장하는 배우들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기대를 걸었지만 관람할수록 수준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의 유명 관광지에 가면 유사한 뮤지컬을 볼 수 있는데 그 스케일이 웅장하여 정말 ‘중국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영~~ 아니다. 영화는 인도영화를 세계적으로 알아주잖아. 이어폰을 착용하여 한국어로 들을 수 있었지만 이것도 너무 수준이하다. 이런 쇼를 50$이나 주고 봐야 하다니... 그리고 카메라는 극장 안으로 반입이 불가하여 외부의 사물보관함에 넣어두어야 했다. 참내, 여러 가지로 놀고 있구먼.
호텔로 와서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점심식사와 비슷하게 나왔고, 김과 고추장 등으로 적당히 먹고 나왔다. 식사를 하고 나서 안마를 받으러 갈 사람들은 가이드와 함께 안마소로 갔지만 나는 내키지 않아서 그냥 숙소로 들어왔다. 내일은 10시에 기차를 타고 가는 일정이기에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오늘이 4일째니까 이번 여행도 절반쯤 소화하는 셈이다. 샤워를 하고 나서 푸근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3월 27일 (수)
아침 7시에 기상을 하여 8시에 식당으로 내려갔다. 빵 두 조각에 꿀과 버터를 바르고 주스와 계란 후라이 한 개를 먹으면 아침식사는 충분하다. 10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나왔다. 오늘은 기차를 타고 ‘카주라호’로 간다.
기차역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기차 타러 나온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혼잡스럽지 않았다. 지나가는 일반기차를 보니 걱정이 많이 되었다. 기차를 탈 기회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어쩌다가 기차를 타도 마산에서 서울까지 KTX만 타 보았기에 고급열차에 익숙한 눈으로 인도의 기차를 보니 한심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1960년대) 부산 광주간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이었지. 방학이라 부산에서 함안까지 고향 다니러 갈 때 디젤기관차 완행열차를 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지만 그 때도 지금 보는 그런 기차는 아니었던 것 같다. 너무 허접한 기차에 엄청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우리가 탈 기차는 이것보다는 조금 낫겠지.
플랫폼이 서너 개 있었나?. 우리가 탈 플랫폼으로 옮겨가서 기차를 기다렸다. 워낙 제시간에 오는 기차가 드물다고 하는 바람에 얼마나 연착을 할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약 15분쯤 지각하였으니 그렇게 늦은 편은 아니다. 차량이 20량도 더 되는 것 같았다. 나는 B1-9좌석이었고, 우리 팀 대부분은 B2 차량이었다. 가이드가 같이 B2에 앉아 가자고 한다. B차량은 열차의 앞쪽이었다. 모두 앞으로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서 기차에 올랐다. 모두 탔는지 인원점검을 해보니 젊은 부부 팀이 안 보이는 것이다. 가이드와 내가 내렸고, 라씨 가이드는 우리가 모여 있던 장소근처까지 가 보았나보다. 3,4분 지났을까 우리 팀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젊은 부부 팀은 순간적으로 뒤편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니다싶어서 일단 기차에 올랐는데, 가이드를 만나 B2로 같이 오게 된 것이다.
우리 차량은 1등급은 아니고,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2등급이라고 한다. 3인이 앉거나 누울 수 있는 간이침대와 옆으로 설치된 의자가 놓여있었다. 여기는 좌석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나보다. 가이드는 이 자리에서 두세 시간 앉아가다가 자기자리에 앉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때 자리를 비워주면 된다고 한다. 두 칸에 우리 팀이 나누어 앉았다. 침대에 눕기도 하고 앉아서 잡담을 나누기도 하면서 기차여행의 낭만을 즐겼다.
점심은 호텔에서 마련한 도시락이다. 닭튀김, 기름기 없는 쌀밥, 샌드위치, 주스 등 구색은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주스와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식사를 마쳤다. 남은 음식은 쉬는 역에서 걸식아동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주었다.
밤 7시 반쯤 카주라호에 도착했다. 기차를 8시간 넘게 탔구나.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서 거의 한 시간을 달려 GOLDEN TULIP HOTEL에 도착했다. 호텔이 크지는 않지만 제법 근사하다. 홀 바닥에 하얀 대리석과 장식용 검은색 돌이 깔려있어서 깨끗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209호를 배정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2층이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역시 방도 너무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여태껏 묵었던 호텔 중에서 가장 시설이 잘 된 방인 것 같다. 잠시 쉬었다가 식당으로 내려갔다. 호텔을 괜찮았지만 식사 메뉴는 여기도 거의 마찬가지다. 고추장에 버무려 김과 감자와 같이 조금 먹었다.
종일 기차만 탔는데 약간 피곤하구나. 직접 운전한 것도 아니지만 좁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면 역시 피로가 누적되나보다. 내일은 5시에 알람, 6시에 식사, 6시 반에 출발한단다. 샤워하고 나서 가볍게 소주 한 잔 걸치고 자리에 들었다.
3월 28일 (목)
삶은 계란과 빵, 과일 등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어제는 기차를 8시간이나 타야했고, 오늘은 버스를 11시간이나 타고 바라나시로 가야한다. 워낙 버스 타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일찍 서둘러 ‘에로틱힌두교사원’을 구경해야 시간이 맞는다. 6시 반에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카주라호’는 인구 3만의 조그만 시골도시이다. 하지만 에로틱힌두교사원 때문에 공항도 생겨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단다. 워낙 규모가 작아서 반경 3km이내에 모든 볼거리가 다 있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10여분 갔을까.
Adinatha사원, Parshwanath사원이라고 화살표가 그려진 건물로 들어갔다. 울타리가 철조망으로 되어있어서 보기에 영 불편하였지만 내가 간섭할 일은 못된다. 외벽은 힌두교의 특성이 보이지만 자이나교 사원이라고 한다. 카주라호의 다른 사원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일부다.
Adinatha 사원의 계획과 디자인은 Vamana 사원의 디자인과 비슷하지만 단지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Adinatha 사원의 바깥쪽 벽의 맨 윗줄은 비행하는 vidyadhara를 묘사하는 반면, Vamana 사원의 꼭대기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장식을 나타낸다. Adinatha 사원의 곡선 탑은 Vamana 사원보다 더 좋은 비율이다. 이것은 좀 더 진화된 조각 스타일과 결합하여 Adinatha 사원이 Vamana temple 후에 지어졌음을 나타낸다.
성전의 특징적인 두 부분 즉, 현관과 성소는 잘 보존되어있는데 현관 지붕은 우아한 디자인으로 주목 받는다.
Parshvanatha 사원도 자이나교 사원이다. 자이나교임에도 불구하고 외벽에는 Vaishnavaite 테마가 있다. 입구에는 가장 완벽한 마술 광장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Khajuraho 기념물 그룹의 다른 사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유산 사이트의 일부이다.
Parshvanatha 사원은 카주라호의 자이나교 사원 중 가장 큰 사원이다. 작은 홀, 큰 홀, 현관 및 성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전에는 두 개의 끝 부분에 돌출부가 있는 직사각형의 구조물이 있다.
입구 현관의 천장에는 체인과 플로랄 패턴이 특징이며, 쌍을 이루는 비행 vidyadharas가 특징이다. 만다 파의 현관 에는 아디나 타 (Adinatha) 승무원의 조각품인 가루다(Garuda)를 탄 10명의 무장한 차크레슈발리에 가 있습니다. 성소에는 지나스 (Jinas)의 조각품이 있다.
외벽에는 3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 조각품에는 우아한 여성, 비행 커플, 댄서, 음악가 및 천상의 존재가 있다. 사원의 Jain 합병에도 불구하고, 벽은 힌두교 신의 조각품 및 그들의 배우자와 화신을 포함하여 Vaishnavite 주제를 나타냈다.
[매직 스퀘어 : 4 × 4 가장 완벽한 마술 광장 이 있는 비문]
7 | 12 | 1 | 14 |
2 | 13 | 8 | 11 |
16 | 3 | 10 | 5 |
9 | 6 | 15 | 4 |
사원에는 "Jaina square"라고 불리는 마술 광장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4 × 4 마술 사각형 중 하나이다. 이 매직 스퀘어는 1부터 16까지의 숫자가 들어있는데 모든 수평 열 및 수직 열과 두 개의 대각선 행의 숫자 합은 34이다
사원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들어가니까 반갑게 맞아준다. 사진이 잘 나오는 장소를 알려주며 포즈를 취하게 하고는 사진도 찍어주는 것이다.
세계인을 유혹하는 ‘에로틱사원’으로 갔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여서 버스는 타지 않았다. 가다보니 ‘전라도밥집’이라고 쓴 조그만 간판이 보였다. 닭도리탕, 떡볶이, 신라면, 김치, 된장찌개 등을 해 준다고 적어놓았다. 여기서 그런 간판을 보니 반갑구먼. 그렇지만 글자를 너무 초라하고 볼품이 없게 적어놓아서 음식 맛이 있을지 모르겠다.ㅎㅎㅎ
가이드가 입장권을 구입하여 사원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보이는 사원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떠 올리게 한다. 탑의 상부는 뾰쪽하고 외벽은 모두 돌로 장식을 했다. 와, 비슷비슷한 사원을 수십 개씩이나 만들어놓았구나. 그런데 이 사원을 만들기 위하여 동원된 인부들은 신을 공경하는 숭고한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을까? 아니면 죽지 못해 이 짓을 했을까? 궁궐이나 성을 축조하는 것은 절대왕권의 절대권력에 의해 동원된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사원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지어졌을까? 그리고 내가 건축을 전공했기에 당연히 드는 의문이 하나 있다. 지금도 조그만 창고를 하나 지으려 해도 도면이 있어야 한다. 짓고자하는 건물을 종이에 그려야 하는데, 옛날에는 종이가 아주 귀한 물건이었고 연필도 없었다. 자, 과연 저런 건축물을 어디에다, 무엇으로 그렸을까? 지금도 저런 건축물을 지으려면 수백 수천 장의 도면이 있어야 짓고자 하는 건물의 얼개를 짐작할 수 있다. 작업하는 인부들이 저런 사원을 건설하려면 뭔가를 보고 작업을 해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공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거운 돌로 저런 건축물을 지으려면 들어 올리는 장비가 있어야 한다. 크레인이 있으면 일도 아니겠지. 그러나 그 옛날에 인력으로는 절대 들 수 없는 큰 돌을 어떻게 차곡차곡 쌓아 올렸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만 답답할 따름이다.
가이드를 따라 이곳저곳 사원 내부도 구경하며 사진도 많이 찍었다. 특히 성행위장면이 새겨진 부분은 좀 더 유심히 지켜보며 이런 조각품을 남길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카주라호(Khjuraho)는 마드야 프라데시 주 차타르푸르(Chhatarpur) 디스트릭트에 있는 사원 유적지이다. 20㎢의 면적에 총 25개의 힌두교 및 자이나교 사원들이 보존되어 있다. 대표적인 중세 힌두 양식의 사원 건축물들로 정교하게 조각된 부조장식들이 유명하다. 그 중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조각 장식이 일부 있기 때문에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으며, 때로는 '사랑의 사원' 혹은 '카마수트라 사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9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카주라호는 중세 힌두 왕조 중 하나인 찬델라(Chandela) 왕조에 의해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9세기에서 13세기 사이 인도 대륙 중앙에 위치한 분델칸드(BhundelKhand) 지방을 지배했던 라지푸트 계열의 왕조로, 이슬람 세력의 침공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화려한 힌두 문화를 꽃피웠다. 대부분의 사원들이 간다(Ganda, 재위 999 ~ 1002) 왕과 비디아다라(Vidyadhara, 재위 1003 ~ 1035) 왕 시기에 건립되었고, 총 85개 사원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왕조 멸망이후 지속적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25개의 사원 혹은 그 흔적들만 전해지고 있다.
사원들은 인구 20,000명 정도의 같은 이름의 소도시 카주라호 인근에 있으며, 크게 서쪽, 동쪽, 남쪽 등 3군데로 나뉘어져 있다. 이들 대부분이 힌두교 사원들로, 그 중 서쪽 편에 가장 많은 사원들이 모여 있다. 동쪽은 자이나교 사원들과 힌두교 사원들이 함께 세워져 있으며, 남쪽에도 몇몇 힌두교 사원들이 모여 있다. 매일 저녁에는 화려한 조명 쇼가 서쪽 사원군 쪽에서 개최된다.
[서쪽 사원군]
* 차우사트 요기니 (Chaunsat Yogini) : (885) 다른 사원과는 다르게 화강암으로만 만들어 진 사원이다. 여신들과 요기니(Yogini)를 위한 신전이며, 지금은 상당부분 파괴되어 있다.
* 치트라굽타 사원 (Chitragupta Temple) : (1023) 인간의 선악을 명부에 기록하는 기록의 신인 치트라굽타와 태양신 수르야를 모시는 신전이다.
* 자그담바 여신 사원 (Devi Jagdamba Temple) : (1023) 다소 작은 규모의 사원으로 섬세한 조각 장식을 자랑한다. 자그담바 여신을 모시고 있다.
* 칸다리야 마하데바 사원 (Kandariya Mahadev Temple) : (1029) 가장 큰 규모의 신전으로 매우 많은 조각 장식들을 가지고 있다. 시바를 모시는 신전이다.
* 락슈마나 사원 (Lakshmana Temple) : (939) 가장 화려한 사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4개의 머리를 하고 있는 비슈누신 (Vaikuntha Vishnu)을 모시고 있다.
* 마탕게슈와르 사원 (Matangeshwar Temple) : (1000) 시바를 위한 신전으로 남근상을 모시고 있다.
* 바라하 사원 (Varaha Temple) : (950) 비슈누 화신이자 맷돼지신인 바라하를 모시고 있는 신전이다.
* 비슈바나타 (Vishvanatha) : (999) 시바를 위한 신전이다. 시바의 문지기신인 난디(Nandi)의 신상도 모셔져 있다.
[동쪽 사원군]
* 아디나트 사원 (Adinath Temple) : (1027) 자이나교의 신전으로, 첫번째 자이나교 신격(Tirthankar)이라 할 수 있는 리샤바나타(Rishabhanatha)를 모시고 있다. 외벽에는 힌두교 신상의 조각들도 장식되어 있다.
* 브라흐마 사원 (Brahma Temple) : (925) 화강암과 사암으로 지어진 비슈누 신전이다.
* 간타이 사원 (Ghantai Temple) : (960) 자이나교의 신전으로, 마하비라 모친의 16개의 꿈 내용을 띠 형식으로 장식하고 있다.
* 하누만 사원 (Hanuman Temple) : (922) 원숭이 신인 하누만을 모신 신전이다.
* 자베리 사원 (Javeri Temple) : (1090) 비슈누 신전이다.
* 파르슈바나타 사원 (Parshvanatha) : (954) 자이나교 신전으로, 가장 크고 정교한 장식을 자랑한다. 북쪽면 조각들이 포인트이다. 23번째 자이나교 신격(Tirthankar) 파르슈바나타(Parshvanatha)를 모시고 있다.
* 바마나 사원 (Vamana Temple) : (1062) 비슈누의 화신이자 난쟁이 신인 바마나를 모시고 있다.
[남쪽 사원군]
* 차투르부자 사원 (Chaturbhuja Temple) : (1110) 비슈누 신전으로 유일하게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조각 장식이 없다.
* 둘라데오 사원 (Duladeo Temple) : (1125) 시바 신전으로 맨 마지막에 지어진 사원이다.
[성행위 조각 장식]
대부분의 사원들은 수많은 조각 장식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데, 이중 10% 정도가 적나라한 성행위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는 탄트라나 카마수트라에서 소개되는 성행위 방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힌두교 철학에서 말하는 '카마(Kama)'의 추구에는 '성욕'의 충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리 어색한 주제는 아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카주라호 유적지는 사람들에게 매우 외설적인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90%의 조각 장식들은 성행위와 무관한 서민들의 일상생활이나 동물, 신화 등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조각상들이 음악을 연주하거나 화장을 하고, 농사를 짓는 장면과 같은 당시의 생활상을 매우 사실적이고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특유의 조형미와 함께 중세 인도인들의 일상을 잘 감상할 수 있다.
[에로틱사원]
카주라호 사원은 찬델라(Chandella)왕조 때 건립되었다. 기타 20여개의 건축물들이 세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브라만교와 자이나교의 두 종교에 속하는 사원들로 건축과 조각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 중 칸다리야(Kandariya) 사원은 화려한 조각이 돋보이는 인도예술의 최대 걸작으로 처마 끝을 여러 층으로 높이 쌓아 올린 지붕이 특징이며, 붉은 사암으로 된 벽면에는 중세 인도의 부조를 대표하는 많은 상들이 새겨져 있다.
가까이 찍은 사진 중에는 블로그에 올리기 낯 뜨거운 장면도 많은데 카주라호 때문에 인도 여행을 계획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여행객을 유혹하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신들과 미투나(Mithua: 남녀가 사랑하는 모습)상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사원의 벽면은 미술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미투나(Mithua)상이 이곳에 새겨진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북인도에 들어온 음과 양, 남과 여, 정신과 육체, 절대자와 피조물의 합일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완전성인 해탈로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인 탄트리즘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카주라호의 미투나 상에 대해 마하트마 간디는 "모두 부숴 버리고 싶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아름다운 조각상이라고도 한다.
카주라호에는 85개의 힌두사원이 지어졌는데 14세기경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어 현재는 20여개의 사원만 남아있고, 그 중 서쪽 사원군이 규모도 크고 카주라호 사원의 특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1시간가량 구경을 하고 사원을 나와서 버스에 올랐다. 나오는 길에 개 한 마리가 길바닥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ㅎㅎ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그림이다. 내가 대학교 졸업하고 81년 11월에 사우디아라비아 공사현장으로 나갔다. ‘메디나’에서 스포츠클럽 신축공사 현장에서 근무했는데, 초기에는 들개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2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무렵에는 들개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인도에서도 여유가 있어서 한국 사람들에게 건설공사를 맡기면 길거리에서 배회하는 개 문제는 저절로 해결 될 것 같다.ㅋㅋ
버스를 타고 바라나시로 이동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여행은 이제 제법 익숙해 진 것 같다. 거의 3시간쯤 달렸을까, 가이드가 뭐라고 하니까 운전기사가 도로변에 차를 세운다. 휴게소도 변변히 없어서 적당한 곳에서 노상방뇨를 하라는 것이었다.ㅎㅎㅎ 재미있네. 남자는 이쪽으로, 여자는 저쪽으로 가서 볼일을 보고 왔다.
다시 차에 오르자 이번에는 라씨 가이드가 분위기를 잡았다.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한국 노래를 불러서 큰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앞에서부터 한 사람씩 노래를 시키는 것이다. 센스 있는 사람은 휴대폰으로 노래방 가사를 보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나도 잘하지는 못해도 못한다고 빼는 성질은 아니어서 ‘가요반세기’를 한곡 뽑았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저 바다가 없었다면, 누가 울어 이 한밤, 한 많은 사연~~~’
12시 반쯤 휴게소에 도착했다. 준비한 도시락을 먹을 시간이다. 휴게소 테이블에 도시락을 펼쳤다. 도시락 박스는 큼직했지만 내용은 별거 없었다. 바나나와 샌드위치를 주스와 같이 먹는 것으로 점심식사를 대신했다. 남은 음식은 모두 박스에 담아서 불우이웃돕기에 내어 놓았는데 수거했던 줌마님은 음식물 박스를 받은 아이가 저쪽으로 가서 모두 버리더라면서 아쉬워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공짜로 얻어먹기는 싫다는 뜻인가? 그러면 관광지에서 버스에 내릴 때마다 손을 벌리며 돈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봐야하지? 여기 문화를 해석하려면 몇 년은 살아야 할까보다.
우리는 생수 사는데 돈을 낭비하지 말라고 했지만 라씨 가이드가 수시로 생수를 제공한다. 날씨가 덥다보니 찬물이면 몰라도 미지근한 물은 그다지 많이 먹히지 않는다. 3월 하순이면 기온이 30도룰 훌쩍 넘어선다. 북인도는 4월부터는 여행 비수기로 접어든다고 한다.
버스가 가다가 중간에 멈춰 섰다. 갑자기 차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운전기사와 조수가 고치는 사이에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 언제나 고쳐질는지 지켜보았다. 다행히 큰 고장은 아니었는지 10여분 지나자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만약 버스에 이상이 생겨 운행이 불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라나시에서 다른 버스가 온다고 해도 4시간을 기다려야하는데... 큰 사고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버스가 도시 이름은 몰라도 도심을 지나갈 때 보니까 도로 중간으로 고가도로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도는 구조계산을 어떻게 하기에 저렇게 가는 철근을 사용할까? 내 상식으로 저런 고가도로를 건설하는 토목현장에서는 최소 D19이상 철근을 사용한다. 보통 D25나 D32를 많이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D13이나 D16을 사용하는 것 같다. 약한 지진이라도 발생하면 견뎌 내지를 못할 텐데... 그리고 안전시설은 너무 부족하다. 저렇게 방치하면 사고도 많이 나겠는데... 하기야 사람 목숨 값이 비싸면 자동적으로 안전시설은 보강하게 되어있다. 우리나라도 그래왔으니까. 이 부분도 내가 걱정할 부분은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
그리고 인도는 도시의 도로 폭이 너무 좁다. 도시계획을 치밀하게 하여 차가 수월하게 다니고 사람도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개선하면 좋을 텐데... 역시 내가 걱정할 부분은 아니지.
바라나시에 도착하니 주변은 깜깜한 밤이었다. 시내를 달리는데 웬 상향전조등을 켜고 다니는 차가 저렇게도 많지? 어림잡아 10%는 눈이 부시게 상향전조등을 켜고 다니는 것 같다. 이렇게 낮은 민도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리려면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그렇지만 부탄이나 네팔, 인도 같은 나라는 행복지수가 높게 나온다고 한다. 뭐든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나 할까. 이렇게 사는 것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되잖아.ㅎㅎ
가이드가 석류, 바나나, 생수, 심지어 튀김까지 수시로 제공하였고, 시간에 맞춰 휴게실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덕분에 12시간의 버스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바라나시의 MEADOWS HOTEL에 도착했다. 배정받은 2007호로 올라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사는 여태껏 먹었던 음식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것저것 조금씩 집어먹고는 숙소로 올라왔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내 방으로 놀러 오시라 얘기도 못했다. 이 호텔은 인도에서 묵었던 호텔 중에서 가장 허접하다. 방도 좁고 시설도 영 볼품이 없었다. 아이고, 하룻밤 묵고 나갈 텐데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자. 샤워하고 조용히 자리에 들었다. 차를 너무 오래 타서 피곤하였는지 쉽게 잠이 든 것 같다.
3월 29일 (금)
4시에 모닝콜이 들어왔고, 5시에 버스를 타고 ‘갠지스 강’으로 갔다.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성당의 새벽 미사에 참석하는 기분으로 갠지스 강변에서 일상으로 벌어지고 있는 힌두교 의식을 구경하러 갔다. 강변의 넓은 광장에서 오른편에는 젊은 아가씨 6명이 노래를 부르고 있고, 전면에는 노란색 천을 두른 테이블에 7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올라가서 절차에 따라 횃불연기를 날리거나 조명등을 돌리는 등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왼편에는 원로로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다. 관람석에는 현지인과 외국인들이 앉아서 이런 의식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도 관람석에 앉아 20여분 구경을 했다. 건장한 청년들이 보여주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매일 아침마다 이런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종교적인 의식은 대부분 신을 섬기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염원하는 것이잖아.
가이드를 따라 조그만 보트에 모두 올랐다. 보트에 오르기 전에 가이드는 종이접시에 담긴 초를 사서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보트가 갠지스 강을 따라 전진하면 초에 불을 붙여서 소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강에 띄우라고 한다.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강에 촛불을 띄웠지만 배의 속도와 물살을 제대로 가름하지 못하여 촛불을 담은 접시는 얼마가지 못하고 물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갠지스 강 건너 지평선으로 해가 솟아오른다. 일출을 감상하는 것도 꽤나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사실 살아가면서 일출을 제대로 감상하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연말연시가 되면 일출명소에 사람들이 모이는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리라. 더구나 오늘은 근처에 군더더기 하나 없이 해가 완벽한 원형으로 솟아오르니 감동이 배가되는 것 같다. 지난 25일 ‘나하르가르 포트’에서 맥주를 마시며 석양을 감상했던 것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갠지스 강’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있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강은 그냥 평온하고 한가롭다. 새벽이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그렇게 더럽지도 않고 나도 물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들 정도다. 현지인들이 물속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강변에 마련된 명상자리(?)에 앉아 가부좌 자세로 앉아 수련을 하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니 왼편에 보이는 것은 화장터라고 한다. 화장터는 공식적으로 사진촬영이 금지 되어있다고 하는 바람에 사진을 제대로 찍지도 못했다. 그런데 다른 배를 탄 사람들은 카메라 사진을 마음대로 찍고 있잖아. 우리 가이드만 너무 원칙에 따르는 것인가? 이럴 때는 ‘만약에’ 혹은 ‘만의 하나’를 생각하면 된다. 이른 새벽에 뱃놀이하면서 사진 찍는 것을 감시하러 사람이 나올까마는, 우리나라에서도 보통 별 일이 없다가도 운이 없을 때는 산불감시원이나 단속경찰에게 걸려서 벌금을 물기도 하잖아. 화장터에서 실제 장작불을 피우며 화장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고, 강에 떠다닌다는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
전체 길이 2,506km, 유역면적 840,000㎢이다. 힌디어로는 강가(Ganga)인데, 어원을 따지면 산스크리트어 강가(गङ्गा)로 '빠르게 가는 것'이란 뜻이다. 한국에 알려진 '갠지스'란 호칭은 고대 그리스어로 강게스(Gángēs)라 음역한 것을 후대에 영어식으로 읽은 데에서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갠지스 강은 그저 더러운 강이지만, 힌두교인들에게는 성스러운 강이다. 또한 불경에도 언급된다. 갠지스 강에서 목욕도 하고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화장해서 갠지스 강에 뿌려주기도 한다. 그만큼 갠지스 강은 힌두교인, 그리고 인도인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고 또 공경의 대상이다.
힌두교에서 시체를 화장함은 영혼을 정화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영혼을 정화할 필요가 없는 승려나 아이의 장례식일 경우 시체를 그냥 물에 흘려보낸다. 또한 뱀에 물려 죽은 사람도 시체를 흘려보낸다. 단순히 시신만 흘러간다면 모르겠으나 갠지스 강 일대가 인구 밀집 지대이다 보니 공장들이 많이 있는데, 문제는 하수정리시설을 제대로 갖춘 곳이 드물고 관련 법규도 미비하여 각종 공장의 오폐수나 빨래시체 썩은 물에 빨래를 하거나 사람이나 가축의 분뇨 등 생활폐수를 갠지스 강에 그대로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래서 그야말로 세균의 강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화학, 공업 폐기물까지 그대로 흘러들어가 수질 오염이 심각하다. 상류 쪽 수질은 그나마 낫지만 하류 쪽은 급수 외 수질이다. 말 그대로 마시기는커녕 씻을 수도 없을 정도로 수질오염이 심각하다는 것. 인도 정부에서도 오래 전부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시늉은 하지만 부정부패나 비용문제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갠지스 강 정화 작업 해당 관청, 연구 싱크탱크 종사자들도 강은 청소해야 하지만 현지인들은 면역력을 키우기 때문에 마시고 목욕하는 건 괜찮아요. 우리도 매일 목욕하는데? 라고 주장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정화 작업성과가 있다곤 하나 강에서 씻고 강물 마시는 것이 종교적 의미와 결부되어 있는 한 근본적인 정화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참다못한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세계 각국의 정상들에게 받은 기념품 1,800여 개 전부를 경매에 올렸고 그 수익금으로 갠지스 강을 정화하기로 했다고 한다.
종종 갠지스 강에 갔다 온 여행자들은 컬쳐 쇼크를 받는다고 한다. 앞서 말한 승려와 배가 기형적으로 튀어나온 아이, 여자의 시체, 그리고 말단부만 타서 사라진 정말 끔찍한 시체가 강물에 둥둥 떠다니고 그 시체를 파먹는 새나 파리도 볼 수 있다. 그렇게 옆에 시체가 흘러가는데 빨래와 목욕, 심지어 물병에 떠서 마시는 사람도 있다. 바로 조금 위에서 사람들이 똥오줌을 싸대고 청소부 아이가 소똥을 강에 쓸어 넣는데도. 불결함과 충격이 가득한 최악의 여행지일 수도 있고 삶과 죽음, 그리고 일상이 뒤섞인 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기회일 수도 있다. 또, 화장을 하면서 돈을 시체 곁에 두고 떠나보내는 풍습도 있는데, 바로 그 하류 쪽에서 어린아이들이 자석으로 동전을 찾으면서 놀기도 하고 주운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기도 한다.
그런 갠지스 강을 "다른 강처럼 정화 능력만 가진 것이 아니라 세균을 죽여 부패를 방지하는 광물질로 가득 차 있다. 갠지스에서는 콜레라균이 3~5시간 안에 죽는다. 때문에 힌두교도들은 콜레라 희생자를 포함하여 수많은 주민의 시체가 버려지고 수천 명이 목욕하는 강물을 안전하게 마실 수 있다고 확신한다."라고 주장하는 도서도 있다. 게다가 책을 읽고 사설을 쓴 사람은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현대 미생물학이 증명해야 할 과제지, 아무 문제없이 사는 그들을 신기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라고 훈수를 두었다. 하지만 정작 콜레라는 갠지스 강 유역의 풍토병에서 유래하였다.
1시간가량 보트를 즐긴 후 뭍으로 올라왔다. 다음 코스는 현지인의 교통수단인 ‘릭샤’를 타는 순서다. 릭샤는 바퀴 3개 달린 자전거와 비슷한 것인데 승객 2명을 태울 수 있다. 2명씩 올라타서 시내를 신나게 돌았다. 여기는 포장이 잘되어 있는 길이어서 운전기사가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아 다행이다. 어쩌면 포장된 길만 골라 다녔는지도 모르겠네.... 2,3층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니 중심상업지역인가보다. 그런데 화재가 발생하면 어떡하지? 건물이 너무 붙어있어서 화재 시에는 대책이 없어보였다. 역시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
호텔로 돌아온 시간은 아침 7시. 두 시간동안 갠지스 강에서 놀았구나. 빵과 계란, 과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10시까지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방으로 들어와 누웠지만 주변 소음 때문에 눈을 붙일 수는 없었다. 책을 보다가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오전에 방문한 곳은 ‘사르나트 (녹야원)’이다. 사르나트 박물관은 금요일이 휴관일이라 박물관 관람은 할 수 없었고 ‘스리랑카 사찰’을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이 조정되었다. 스리랑카 사찰에는 상당한 크기의 범종이 매달려있었다. 어? 한글도 보이네... ‘전법윤경(轉法輪經)에서 발췌한 최초의 부처님 말씀’이라고 적혀있다. 검은 돌 판에 부처님의 말씀을 여러 나라 글로 표현하였는데 한글로 된 것도 있어서 엄청 반갑다. 한국불교도 세계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나보다.
사찰 내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고 안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었다. 사진이 없다보니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부처님의 모습이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게 표현되었다는 것과 일본사람이 그린 벽화가 있는데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나타내고 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생각난다.
스리랑카 사찰에서 나와 10분 정도 걸어서 사르나트로 갔다. 사르나트는 석가모니가 득도한 다음 5명의 제자에게 처음으로 진리를 설파한 곳이다. 그리고 녹야원(鹿野苑)은 왕이 사냥을 나와 천 마리의 사슴을 생포하였는데, 사슴 왕이 하루에 1마리씩 식용으로 상납하다가 또 간청하여 상납하던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지면서 녹야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단지배치도를 보니까 처음 지었을 때는 제법 큰 규모로 건설하였나보다. 마치 유적지를 발견하는 현장처럼 건물 주춧돌 위치에 벽돌로 제단 비슷하게 만들어놓았다. 건물이 한 두 개가 아니었네.
2층 구조로 된 원형 탑이 서있다. 돌을 벽돌처럼 규격에 맞게 잘라서 쌓은 것 같다. 자세히 보니 돌에 온갖 조각을 하여 탑을 쌓았는데 양각, 음각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는 등 상당한 기교를 부려 만든 탑이었다. 탑 주위로 십여 명쯤 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조그만 동자승 2명을 앞세워서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갈색 법복을 입은 승려도 있고, 승려는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흰옷을 입었다. 아이들을 위한 행사인 것 같은데~~ 우리도 탑돌이를 했다. 이런 종교적인 행사(?)는 뭔가 기원하는 뜻이 들어있어야지. 갓 돌이 지난 우리 손녀가 무탈하고 아름답게 자라기를 소망한다....
지금의 인도 바라나시 북방 약 7㎞에 위치한 사르나트를 말한다. 지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출요경(出曜經)에 의하면 과거에 바라나 국왕이 이곳에 이르러 사냥을 할 때에 1,000마리의 사슴을 생포했는데, 사슴의 왕이 하루에 1마리씩 식용으로 보내주겠다고 애원하여 모든 사슴이 풀려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녹야원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뒤 이곳에서 교진여(橋陣如 Kauṇḍinya)를 비롯한 5명의 수행자에게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설하여 이들의 귀의를 받았다. 이들의 귀의로 비구(比丘)가 처음 생겨났으며 이와 더불어 불교교단이 비로소 성립되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초기 경전에서부터 이곳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Lumbini),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Bodhgaya), 열반에 든 쿠시나가라(Kusinagara)와 더불어 불교도들이 순례해야 할 4곳 가운데 하나로 설해졌다. 이후 아소카 왕이 불교성지를 순례하면서 이곳에 탑과 석주(石株)를 세운 뒤 더욱 뭇 신도들의 숭앙을 받아왔으며, 8세기 초 현장(玄奘)이 순례할 당시만 해도 이곳은 약 30m 높이의 정사(精舍)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그 주위 100여 단이나 되는 감실에는 황금 불상과 부조가 있다. 안쪽에도 등신대의 초전법륜상(初傳法輪像)이 줄지어 있고 1,000여 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등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 무렵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에게 유린되어 폐허가 되었다. 현재는 2층 원탑(二層圓塔)과 부러진 아소카 왕의 석주 등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아소카 왕의 석주 머리에 있던,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4마리의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 호텔의 식사는 다른 호텔에 비하여 한결 낫다. 시금치나물도 있고, 가지튀김도 있다. 감자 찜도 있고... 향이 들어있지 않아서 먹을 만했다.
이 호텔 직원들은 참 친절하다. 주스나 커피도 날라주는 등 우리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이다. 조금 있으니 호텔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뭔가 요청을 하였다. 알고 보니 이 호텔에 대한 평가를 좋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한우’님이 기꺼이 수고를 해 주셨다. 휴대폰으로 호텔을 검색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댓글을 다느라 30분이 넘는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 정도 친절을 베풀었으니 한국인에 대한 인식도 한결 나아지겠지. ㅎㅎ 뜻밖에 아이스크림이 한 그릇씩 서비스로 나왔다.
갑자기 김승애님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큰소리로 폰이 없어졌다고 한다. 조금 전까지 충전하기 위하여 호텔 카운터의 전원에 연결해 놓았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카운터를 지키던 아가씨도 잠시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다. 아가씨가 직원들에게 전화를 해보더니 방금 나간 팀에게 폰을 주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 팀은 우리가 다녀왔던 사르나트로 갔다는 것을 알고 바로 직원을 보내어 찾아오게 하였다.
오후에는 비단으로 만든 상품을 보러갔다. 창고 같은 곳에 직물을 짜는 직기를 설치해 놓고 사장이 나와서 설명을 하였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매장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서 실크침대커버, 베개커버 등 이것저것 설명을 들었지만 별 소득이 없었던 것 같다. 나도 우리 손녀에게 맞을 물건이 있을까 기웃거려보았지만 보이지 않아서 그냥 나왔다. 섬유도 우리나라 제품을 세계적으로 알아주잖아. 비싸서 흠이지.
가이드가 같은 건물 2층으로 안내했다. 여기서는 또 무슨 물건을 파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인도요가를 체험하는 체험장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테이블에 가부장자세로 앉아서 설명을 하면서 우리도 따라하게 했다. 바닥에는 쿠션이 깔려있어서 따라 하기에 별로 무리가 없었다. 바닥에 누운 채 다리를 들어 옆으로 움직이거나, 배를 바닥에 대고 다리와 가슴을 들어 올리는 자세 등 어렵지 않은 액션을 취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아이고’ 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20여분 요가를 배웠다.
요가체험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이제 국내비행기를 이용하여 다시 뉴델리로 돌아간다. 국내선은 15kg까지 수화물로 탁송할 수 있다고 하는 바람에 가방에 넣어두었던 책을 꺼내어 백팩에 담았더니 어깨가 묵직하다. 우리 전체 인원수로 수하물 무게를 계산하기 때문에 굳이 책을 꺼낼 필요가 없었는데... 좌석표를 받으니 이륙시간이 18시 30분이다. 좌석번호는 26B. 역시 통로 쪽이구나. 다행이다.
저녁식사는 도시락이 준비되었다. 공항에 가서 대기석에 둘러 앉아 도시락을 펼쳤다. 아니. 이게 뭐지? 와,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밥이네~~ 뜻밖에도 안남미가 아닌 우리가 즐겨먹는 ‘자포니카 쌀’로 지은 밥이다. 반찬도 계란말이, 멸치볶음, 감자, 양배추 등 하나도 버릴게 없는 우리음식이다. 어떻게 준비했을까? 여기에 우리교포가 식당을 하는 곳이 있나보다. 아니면 이런 음식을 구할 수가 없지. 정말 맛있는 밥을 즐겁게 먹었다.
국내선 비행기 타는 절차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무난히 검색대를 통과하여 비행기에 올랐다. 예약좌석이 다 찼는지 비행기는 10분 일찍 이륙하였고, 1시간 10분을 비행하여 뉴델리에 도착하였다. 다시 수화물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우리를 태울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뉴델리의 밤풍경은 천만 인구를 보유한 인도의 수도답게 삐까뻔쩍 휘황찬란하다. 그런데 공항에서 숙소까지 무려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바라나시에서 뉴델리까지 오는 시간보다 버스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
COUNTRY INN BY RADISSON HOTEL은 나도 제법 해외여행을 다닌다고 다녔는데, 여태껏 다니면서 묵었던 호텔 중에서 단연 최고라 할만하다. 노랑풍선 여행사의 이번 관광 상품을 정할 때 1박은 특급호텔에서 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이 정도로 고급일 줄은 상상을 못했다. 넓은 중앙로비는 웅장하고 멋지게 장식을 하였고, 지하1층의 대규모 뷔페식당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다. 342호를 배정받아 방으로 들어가니 혼자 자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부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넓은 방에 킹사이즈 침대가 두 개나 배치되어 있고, 화장실도 고급스럽다. 화장실 문이 여닫이가 아니고 미닫이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상부에 레일을 장치하여 행거도어로 시공하면 공사비가 엄청 많이 들어간다니까. 노랑풍선 여행사의 전략이 매우 훌륭하다. 인도 여행 마지막 밤을 가장 멋진 호텔에서 보낼 수 있도록 계획을 잡았구나. 좋아요!!
오늘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돌아다녔기에 제법 피곤하였나 보다. 샤워하고 자리에 드니 바로 잠이 들었다.
3월 30일 (토)
7시에 기상하여 7시 반에 식당으로 갔다. 특급호텔 뷔페식당이라 온갖 먹거리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그래도 내 손이 가는 음식은 한정되어 있다. 빵에 꿀과 버터, 잼을 발라서 주스와 같이 먹으면 식사 끝. 이렇게 멋진 식당에 아무리 찾아봐도 달걀이 보이지 않는다. 주방장이 깜빡했나보다. 없으면 안 먹으면 되지 뭐~~
오늘 인도관광 마지막 날이지만 일정이 그렇게 빠듯하지 않나보다. 가이드는 9시 반까지 로비로 내려오라고 했다. 나는 일찍 내려와서 호텔 구경을 했다. 뒤로 돌아가니 사용하지 않는 공간도 많았고, 옆에서 들어오는 현관홀에도 괜찮게 보이는 미술장식물로 치장을 해 놓았다. 이런 작품들은 돈 꽤나 들었겠는데....
9시 40분에 버스에 올라 호텔을 나왔다. 델리의 명소를 구경하고 오후에 공항으로 가면 된다. 라씨 가이드가 ‘델리’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다.
* 인구 1,400만으로 인도에서 3번째로 큰 도시로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 올드델리는 무굴제국이 조성하였고, 뉴델리는 영국 식민지 때 건설하였다.
* 지하철이 있는데, 한국에서 기술을 도입하여 지금은 전동차를 자체 생산하고 있다 - 도심 곳곳에서 지하철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 공기가 좋지 않아 항상 뿌연 하늘을 이고 살고 있다.
* 델리에서 운행하는 버스는 커튼을 칠 수 없다 - 성폭행 사건이 뉴스에 보도된 이후로.
* 결혼문화 - 최고의 축제일 / 같은 종교, 같은 계급, 같은 성끼리 혼인
: 95%는 중매를 통해 이루어지며 결정권은 남자부모에게 있다.
: 남편의 직업에 따라 여자 측에서 지참금을 가지고 오는 것이 관습이다. 보통 2,3만$
: 따라서 딸을 낳으면 머리가 아파... 가이드도 딸만 둘이어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단다.
: 아직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게 남아있고, 예비신랑 아버지는 중매쟁이가 보여주는 여자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른다.
: 혼수준비는 LG나 삼성 가전제품을 선호하기 때문에 비싸도 많이 구입한다.
: 양가에서 협의하여 약혼식 날짜, 지참금 지급 날짜, 결혼식 날짜 등을 결정. 지참금액 이 결정되면 절반을 먼저 주고 결혼식 날에 절반을 주기도 한다.
: 선을 볼 때는 신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여 지식수준이나 병이 있는지 점검한다.
: 결혼식 1주일 전부터 강황 등으로 마사지.
: 결혼식은 신부 집에서 거행하고, 신랑 어머니는 집에서 대기. 신부 부모는 종일 단식.
: 아직 대가족제도가 유지되고 있으며 장남이 부모를 모시는 것이 전통이다.
먼저 ‘라지 가트’로 갔다. 레드 포트 남쪽에 있는 검은 대리석 연단은 1948년 암살을 당한 ‘마하트마 간디’의 화장이 진행된 지점이다. 국경일 및 간디가 사망한 날에는 이 지역이 폐쇄되기도 한다. 근처에 있는 국립 간디 박물관(National Gandhi Museum)에는 간디의 소지품과 사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으로 많이 봐서 눈에 익은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인도를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시킨 위대한 인물이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은 뒤로 '마하트마 간디'라 불리게 되었다. 위대한 인물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영광을 누렸다.
다음으로 시크교 사원 ‘방글라사힙’으로 갔다. 흰색 대리석으로 지은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연상되는 사원이다. 시크교사원의 특징은 흰 대리석 건물 위에 황금 돔을 올리는 것인데 이 사원의 황금 돔의 무게는 300kg이나 된다고 한다. 황금색 돔이 있는 본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기실로 가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두건을 둘러야 했다. 입장할 때도 발을 씻어야 하는데 세족장은 계단 앞에 조그맣게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도 실내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신도들도 많겠지만 관광객이 엄청 많다. 신자들의 신성한 기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둘러보고 빠르게 본당을 빠져나왔다.
사원 옆에는 ‘신성한 연못’이라는 ‘사오르바르’가 있다. 물이 깨끗해 보인다.
본당 앞마당에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섰더니 약밥 비슷하게 생긴 것을 조금씩 손바닥에 얹어주는 것이다. 마치 성당에서 미사 막바지에 성체를 나누어 주는 것처럼.... 맛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대기실로 가서 두건을 반납하고 나왔다.
평등과 자비의 시크교 성지로 정확한 명칭은 ‘구르드와라 방글라 사힙’이라고 한다. 무굴 왕조가 들어서기 전에 인도 북부사람들은 시바와 비슈누 등 여신을 숭배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악바르 자신은 이슬람교도였지만, 힌두교도와 비이슬람인을 억압하지 않았다. 악바르의 종교철학은 특정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진실되다는 주장은 결코 지혜일수 없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정의를 지표삼아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며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문화를 수용한다. 그러한 배경으로 탄생한 종교가 시크교이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상호교류를 통해 탄생한 급진종파. 현재 세계 5대 종교 중의 하나인 시크교는 인도 북부에서 힌두교의 신애(信愛:바크티) 신앙과, 이슬람교의 신비사상(神秘思想)이 융합된 종교이다. 1539년에 사망한 시크교의 교주 나나크는 이슬람교처럼 유일신을 믿고 헌신적으로 살면, 힌두교의 믿음대로 깨달음을 얻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인도 특유의 카스트제도를 없애자고 주장하여 눈길을 끌었고, 출가보다는 일상생활에 충실하기를 권하였다. 이렇듯 현실에 충실한 시크교인들은 인도 내에서 부유층에 속한다고 한다. 항상 부지런하고 정직하며 덕을 쌓으며 자비를 베풀며 산다고 한다. 시크교인의 특징은 염색한 천으로 두껍고 정교하게 말아 올린 터번을 두르고, 길게 기른 수염이다. 현실에 맞게 수염은 깎아도 되지만,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는다고 한다.
구르드와라 방글라 사히브는 델리에서 가장 유명한 시크교 성지다. 1664년, 시크교의 8대 구루였던 7살의 하르 크리샨(Har Krishan)은 자이 싱 1세의 초대로 델리에 몇 달을 머무른다. 그때 천연두와 콜레라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치료소로 삼아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치유력이 있다는 거처 우물의 성수를 나눠 주며 치료했지만, 자신은 천연두에 걸려 그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후 이곳은 성지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식량... 인도에서는 더위 때문에 죽는 사람은 있어도 가난해 굶주려 죽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대통령궁, 정부청사, 인도문 등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차창관광으로 눈요기만 했다. 호주의 오페라하우스를 닮은 ‘바하이 사원(연꽃사원)’으로 갔다. 여기도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입장시키면서 간단하게 소지품 검사를 했다.
멀리 보이는 사원은 정말 호주의 오페라하우스를 빼닮았다. 우리 팀은 사원을 배경으로 단체사진과 독사진 등 사진부터 찍은 후에 사원으로 올라갔다. 계단 아래에서 신발을 넣는 비닐봉투를 지급하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입장해야 하는 곳이 많구나. 워낙 관광객이 많이 오다보니 건물입구에서 출입통제를 하고 있었다. 일정시간 대기 시켰다가 좌석이 어느 정도 비면 그만큼 입장시키는 것이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입장할 수 있었다. 역시 실내는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고.
내부는 의외로 너무 소박하다. 종교의 부분 없이 누구라도 들어와서 기도를 하는 곳이라 긴 의자만 놓여있었다. 우리도 자리 잡고 앉아서 10여분 명상에 잠겼다가 나왔다. 호주의 오페라하우스는 콘크리트 구조물에 그렇게 크지 않은 정사각형이나 사각형 타일을 붙여서 모양을 내었지만, 바하이 사원의 연꽃모양 지붕은 콘크리트 PC로 조립되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정말 비슷하게 닮았지만 건축적으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건물이었다.
연꽃사원(Lotus Temple)으로 알려진 바하이 사원(Bahai Temple) 호주의 오페라하우스를 그대로 벤치마킹. 이슬람교의 한분파로 시작한 신흥종교로 우리나라에도 약 2만 명의 신도가 있다. 창시자는 바하울라(Baha Ullah)로 전 인류의 형제화, 종교의 통일, 모든 국가의 통일을 주장한다. 특이한 점은 부처나 예수 등 모든 종류의 성인이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 위해 현신한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에펠탑이나 타지마할을 능가하는 1일 최대 15만 명의 방문객수를 기록하고 있는 바하이 사원은 이란 태생의 캐나다 건축가 Fariborz Sahba가 10년에 걸쳐 설계 및 프로젝트 추진을 담당하였고 약 800명의 엔지니어와 테크니션의 도움을 받아 1986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이 장엄한 사원은 현대 인도의 타지마할이라고 부른다. 이 건축물은 반개한 연꽃의 형태로 대리석과 시멘트, 백운석으로 지어져 있고 잘 정돈된 잔디로 싸여있다. 27개의 거대한 연꽃잎 모양의 사원을 멀리서도 볼 수 있으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입장이 허용된다. 입구에서 신발 보관소부터는 맨발로 가야한다.
1987년 각종 건축 잡지에서 그 해의 세계 3대 건축물로 뽑혔으며 1994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외관을 따서 연꽃사원(Lotus Temple)으로 부르고 있으며, 40미터 이상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저곳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겠지 하고 갔지만 그 안에는 의자들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다들 관광지를 구경하러 온 사람만 있었고, 그래서 약간은 많이 실망했다. 바하이 사원 내에서는 침묵이라는 한 가지 규칙만 따르면 되고 각자의 종교에 따라 기도를 올리면 된다. 숫자 9를 신성시하여 구면체로 이루어져있으며 세계에 있는 어느 바하이 사원보다 가장 아름답다.
연못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27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 봉오리 모양의 외관이 인상적인 사원으로 사원이 자리한 공원의 조경 역시 훌륭하다. 사원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데 화려한 외관에 비해 볼거리는 떨어지는 편이다.
점심식사를 하러갔다. ‘THE GREAT KABAB FACTORY'라는 식당에서 인도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였다. 유일하게 호텔에서 하지 않은 점심식사였구나. 메뉴가 여태껏 먹었던 현지식과 조금 차이가 난다. 스테이크, 감자튀김, 통닭 등 먹을 만한 것들이 제법 나왔다. 주동설 큰형님이 와인을 한 병 주문하셔서 마지막 식사 축배를 제의하셨다. 와인 색깔이 참 좋네. 내 몫은 물론 술을 못 드시는 분들의 잔도 내가 말끔하게 비웠다.ㅎㅎ
식사를 했던 건물이 유명한 상가였나 보다. 예쁜 디자인의 옷가게도 있고 보석가게도 있었다. 이은숙님은 인도의 보석이 가격도 저렴하고 품질도 좋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 구입하려고 미리 준비를 하셨나보다. 제법 오랜 시간 실랑이를 벌리고 나서야 구입하셨다.
인도 관광의 마지막 코스는 ‘구뜹 미나르’였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양식이 혼합된 높이 73m의 5층 석탑이다. 탑의 바닥 직경은 15m, 꼭대기는 2.5m로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술탄 구뜹 우딘(Qutbuddin)이 1193년 델리의 힌두 왕조를 패배시킨 기념으로 건설한 ‘승리의 탑’이다. 1층은 힌두양식, 2·3층은 이슬람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노예왕조의 쿠트브 딘 아이바크가 델리 정복기념으로 1193년에 건립을 시작하여 1368년에 완공되었다. 각층 사이에 발코니가 있고, 내부는 나선형의 379계단이 있다. 외벽에는 코란의 구절이 새겨져있다. 술탄 구뜹은 첫 번째 층 밖에 짓지 못했고, 지금의 5층탑은 후대 왕들이 증축하였다. 1층~3층은 붉은 사암, 4층~5층은 대리석과 사암을 사용했다. 기록에 의하면 탑의 상층부는 지진으로 인하여 두 번의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하지만 표면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과 층을 구분하는 발코니는 지금까지도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 예전에는 탑 내부관람이 가능했으나 외국관광객의 추락사가 발생하는 바람에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부지 안에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쿠와툴 이슬람 모스크’가 있다. 원래 이 사원이 있던 자리에는 27개의 힌두 사원이 있었는데 구뜹웃딘 에어백이 27개의 힌두 사원을 모두 파괴하고 그 자리에 이 사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 간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4세기에 세워진 높이 7.2m의 ‘오파즈 철주’이다. 철은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면 산화철이 된다. 즉 녹이 슨다는 말이다. 그런데 99.9% 순철로 만들어진 이 기둥이 어떻게 1500년이 지나도록 저렇게 말짱한 모습으로 서있단 말인가? 현대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로써 모든 관광 일정이 종료되었다. 공항 가는 길목에 있는 서너평 규모의 가게에 들렀다. 여러 가지 약품과 비누, 치약, 차, 커피 등등 인도에서 생산하는 생필품을 살 수 있어서 귀국선물을 마련하기에 좋은 곳이다. 바로 앞서서 우리나라 관광객 한 팀이 들어와서 왁자지껄 소란스럽게 쇼핑을 하고 나갔다. 우리 팀은 조용조용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쇼핑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했다. 라씨 가이드는 우리가 거쳐 왔던 코스를 하나하나 들추며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은숙님이 일어나서 팀원들께 양해를 구했다. 착하고 순하게 생긴 라씨 가이드에게 약간의 성의를 표하자는 의견에 모두 동의한 덕택에 약간의 금일봉(?)을 전달할 수 있었다. 라씨 가이드는 공항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우리가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출국과정은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수하물을 부치고 좌석표를 받으니 ‘19시 40분 이륙하는 KE482편 항공기 49G’로 지정되어 있었다. 갈 때는 빈 좌석이 거의 없구나. 자리를 잡고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려 역시 영화를 틀었다. ‘매디슨카운티의 다리’와 ‘스팅’을 보았다. ‘매디슨카운티의 다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겸 주연배우로 등장하는 고전영화다. 1995년 작품이니까 24년 전에 보았네. 어렴풋이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었지만 다시 보니 내가 기억하는 부분과 제법 차이가 있었다. ‘스팅’은 로버트 레드퍼드와 폴 뉴먼이 연기한 1973년 작품이다. 정교하게 연출된 사기 치는 장면들이 오래토록 내 가슴에 남아있었지. 이런 작품들을 비행기에서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 비행기는 비행시간이 훨씬 줄어든다. 7시간 남짓 걸려서 무사히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수하물을 모두 찾고 나서 우리 팀은 이별의 악수로 해단식(?)을 가진 후 헤어졌다. 나는 마산행 공항리무진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7박9일의 북인도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인도 관광은 북인도, 남인도, 동서인도 이렇게 세 가지 패키지상품이 나와 있다. 북인도 관광을 그런대로 잘 마쳤으니 남인도와 동서인도 여행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기회를 만들어 보자.
이미선이 다녀온 곳 중에서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은 스페인이다. 달력을 보니 9월에 추석 지내고 나서 다녀오면 좋겠다. 그 동안 목디스크, 허리디스크로 몸이 온전하지 못했는데 잘 추슬러서 여행 다니기에 지장이 없도록 만들어야지.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돈, 시간, 건강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할 수 있잖아. 더 나이 들기 전에 부지런히 다니자.
여행을 다닌다고 다녔는데 여태껏 한 번도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지는 못하였다. 이번에도 모두 처음 만나는 분들이었지만 분위기는 나름 괜찮았던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좋은 분위기 만들어가며 같이 여행하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고 큰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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