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관광 후기모음

(2019. 5. 29 ~ 6. 7) 스페인, 포르투갈 8박10일

달리는 흑토마 2019. 7. 17. 15:04

                      스페인, 포르투갈 810

                                                                                                    조 황 래

지난 3월에 인도를 다녀왔고, 다음 여행은 9월로 예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스케즐이 변경되었다. ‘미래안전최상용 사장이 사무실로 나와서 일 거들면서 용돈벌이나 하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일정을 앞당기게 되었던 것이다. 자주 찾는 여행사 몇 개를 비교 검토하여 호주, 뉴질랜드 여행 때 이용했던 ‘KRT여행사를 선택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를 묶어서 12일짜리 상품을 겨냥하여 예약까지 했는데, 5월에는 그 상품은 참가인원 부족하여 성사가 안 되는 바람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810일로 다녀오는 상품으로 결정하였다. 선지급했던 예약금은 이번 여행에 이월되는 것으로 담당자와 협의하였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등 자국기를 이용하면 스페인까지 바로 갈 수 있지만 가격에서 제법 차이가 난다. 1년 가까이 괴롭히던 목디스크, 허리디스크도 꾸준히 진료를 받아 이제 통증을 거의 못 느낄 정도로 호전되었기 때문에 비행기를 오래 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번 상품은 터키항공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스탄불에서 환승하여 스페인 마드리드로 가므로 인천에서 15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지만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스페인 기후는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2,3도 높을는지. 비슷한 위도 상이니까 날씨도 비슷하겠지. 그러면 옷 준비는 별문제가 없겠구나. 반바지와 얇은 여름바지, 소매 짧은 티 몇 벌 챙기면 되겠다.

식사는 인도와 달리 향이 들어가는 음식이 없을 테니 그것도 괜찮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멸치와 고추장, 김만 조금 챙겼다. 소주는 큰 병으로 하나만 넣었다. 부족하면 현지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조금 구입하면 되겠지.

이번에도 여행지에 대한 사전조사를 했다. 여행사의 일정표에 따라 우리가 방문할 곳에 대하여 미리 공부를 조금 하면 가이드 설명이 보태져서 훨씬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수 있으니까. 인터넷 검색하여 챙겨보니 27쪽이나 되었다. 출력하여 가방에 넣었다.

529일 출발하여 67일 돌아오는 일정이다. , 출바알~~~~

 

529~30(~)

KRT여행사의 일정표에는 오후 830분에 제1터미널에서 미팅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산에서는 인천공항 리무진을 타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5시간 소요되므로 오후 330분 버스를 타면 좋은데 아쉽게도 마지막 버스가 오후 210분에 있다. 별 수 없지 뭐, 남는 시간은 인천공항에서 보내야겠다. 평일이라 고속도로도 정체구간 없이 곧장 올라왔다. 1터미널 3층 대합실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기다리다가 오후 8시 조금 지나서 김숙영 가이드와 만날 수 있었다. 주의사항을 듣고 안내문을 받았다. 티켓팅은 내 여권을 발권 담당자에게 제출하는 것으로 상황종료. 창 쪽이 아닌 통로 쪽으로 해 달라는 요청도 받아들여진 '35C' 좌석표를 받았다. 큰 가방을 수화물로 보내고 출국절차를 밟아 면세점까지 나오는 것도 어렵지 않다. 검사대를 통과하는 것도 몇 번 해보니 요령이 생겨서 쉽게 나올 수 있었다.

 

2345분 이스탄불 발 TK091편은 2250분부터 탑승을 시작했다. 예정시간에 이륙한 비행기가 정상궤도에 올라가자 나는 이번에도 책은 가방에 넣어두고 영화를 보았다. 극장에서 아바타를 정말 재미있게 보았기 때문에 2편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비슷한 소재의 공상만화, 오락게임이 난무하다보니 제작을 포기 했는지 모르겠다. 다시 본 아바타는 여전히 재미있었다. 아바타를 다 보고, 'The Judge'를 절반쯤 보았다. 기내식도 두 번 나왔는데 모두 먹을 만했다. 국적기가 아니어도 우리 입맛에 맞는 도시락을 준비해 주니까 불편은 없다. 10시간 40분을 비행하여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환승수속을 밟아 스페인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공항을 둘러보았다. 이스탄불 공항도 규모는 엄청나지만 마감공사 수준은 부분적으로 미흡했다. 공항 일부바닥을 아이보리색의 대형타일(1.2m x 1.0m)로 깐 것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 타일은 깨지기 쉽고 때가 잘 타잖아. 내 눈에도 여러 군데 균열이 생긴 것을 볼 수 있었다.

2시간 남짓 기다려서 마드리드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이번에는 '19G'좌석을 지정받았다. 마드리드로 가는 동안 절반만 보았던 ‘The Judge'를 마저 보고, ’쥬라기 월드도 관람했다. 우리말로 더빙이 되어 있어서 수월하게 볼 수 있었다.

 

현지시간 1020분에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스페인 입국수속을 밟아 밖으로 나오니 오전 11시가 조금 넘었다. 현지 가이드 박영숙과 만나서 대기 중이던 버스에 올랐다. 우리 일행은 모두 17명으로 파악되었다. 구성을 살펴보면 아들 둘과 함께한 50대 부부 4, 중학생 딸과 함께 온 강원도 40대 부부 3, 대학생 딸과 함께 온 진주 모녀 2, 절친과 함께한 3명의 50대 부산 아줌마, 중학생 딸과 함께 온 40대 모녀 2(스케이트 선수 이상화 닮음), 언니와 함께 온 60대 자매 2, 그리고 나 이렇게 17명이다.

박영숙 가이드는 부산 아줌마인데, 스페인 온지 10년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 사투리가 나는 듣기 좋았다.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까지 안내를 맡는다고 하였다. 바르셀로나까지 모두 함께하지 왜 중간에 바뀌는지 모르겠네.

우리가 17명이라 약간 걱정했지만 여기 관광버스는 대부분 50인승 대형버스라 1사람이 좌석 2개를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다. 버스를 타고 먼저 레알마드리드 축구장으로 안내를 하면서 스페인에 대하여 여러 얘기를 해 주었다.

*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건조하고 더운 날씨. 우기는 겨울철이라 지금은 비가 내리지 않는 계절이라고 한다.

* 썸머타임이 적용되어 지금은 한국보다 7시간 늦음.

* 인구에 비해 땅이 넓고, 하늘도 푸르고 공기가 맑아서 유럽 사람들이 휴가차 많이 방문.

시내에 30~40층 되는 빌딩은 4채 뿐.

* 해발 630~680m의 높은 분지형이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한 편이다.

* 하루 중에서 오후 6시경이 가장 덥고, 10시가 되어야 해가 진다. 등등

 

레알마드리드 축구장의 정식 명칭은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축구장이다. 1947년에 설립하였고 수용인원은 81,044명이라고 한다. 8만 명을 넘게 수용할 수 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검색을 해보니 3개층 5구획으로 나뉘어져있었다. 위쪽에서는 축구선수 얼굴도 잘 안 보일 텐데... 축구장 구경하는 티켓을 25유로(25,000)나 주고 사야한다는 것이 일반인은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러나 축구 축자도 모르는 사람도 3시간 정도 즐겁게 구경하고 나왔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구경하기 쉽도록 잘 꾸며놓은 것 같다.

우리는 외관만 구경하면서 카메라에 담고 나서 식사하러 아리수식당으로 갔다.

 

여기는 꽃보다 할배팀이 와서 식사를 했다는 식당이다. 순두부를 먹었는데 맛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비행기 여행에 지친 몸을 한식으로 풀었다는데 의의가 있었다. 메뉴판을 보니까 순두부, 된장찌개, 김치찌개, 육개장, 갈비탕 등은 모두 16유로(20,000)라고 적혀있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구나.

 

프라도 미술관으로 갔다. 입장하면서 한글로 된 안내문을 하나씩 받았다. 기분이 괜찮네.. 입장료가 15.5유로(20,200)으로 싼 편은 아니다. 프라도 미술관의 기반이 된 컬렉션은 15세기 스페인 왕실에서 시작되었다. 왕들이 취향에 따라 수집한 작품들, 왕실 화가의 그림, 그 밖에도 왕실 소유의 건물에 걸려 있던 작품 등이 기반이 되어 1819년에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당시 왕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미술관 개관을 도왔다. 바로 이 점이 프라도가 유럽의 다른 대규모 미술관과 다른 점이다.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프라도는 미술에 대한 사랑과 미술 애호가들의 열정으로 태어난 곳이다. 그림과 조각을 위한 전용 박물관으로 설립되었으며 5,000개 이상의 그림과 2,000개 이상의 판화, 1,000개 이상의 주화와 메달 그리고 2천 개 이상의 장식물과 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조각상은 700개 이상이 있다.

박영숙 가이드는 중요작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뽐냈다.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1시간 40분가량 열정적으로 해설하는 가이드의 모습이 좋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사진을 못 찍게 하였으니 그림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 뭐....

 

스페인광장으로 갔다. 지난번 로마에 갔을 때도 스페인 광장이 있었는데.... 거기는 스페인대사관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기억한다.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스페인 광장은 마드리드 최고의 번화가인 그란 비아가 시작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1930돈키호테로 잘 알려진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사후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기념비가 서 있는 곳이다. 기념비 중앙에는 작가 세르반테스가 앉아 있고 그 앞에 로시난테를 타고 있는 돈 키호테와 당나귀를 타고 있는 산초 판사의 청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왕궁도 구경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외관만 둘러보았다. 왕은 여기서 거주하지 않고 영빈관으로 사용한단다. 맞은편의 큰 건물은 마드리드 대성당이다. 역시 들어가지는 못하고 외관 구경만 허용되었다.

조금만 걸어가니 시내 중심상가로 연결이 되었다. 박영숙 가이드는 연결된 각 도로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1시간의 자유시간을 주며 보고 싶은 것을 골라 보라고 한다. 여기도 관광객들이 엄청 많이 모이는 곳인가 보다. 도로변에 설치된 테이블에 앉아 맥주와 안주를 시켜놓고 온갖 얘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여유롭게 보인다. 오래된 상가 입구에는 동판으로 개장연도를 적어놓았다. ‘1578이라고 적힌 것도 있었으니까 500년이 다 되어 간다는 뜻인가? ‘1725’년도 있지만 ‘1900이라고 적은 것은 명함도 못 내밀겠다.

 

마요르광장도 구경하였다. 중세에는 시장으로 사용되던 장소였는데, 펠리페 3세 때인 1619년 주요 행사가 열리는 광장으로 건설된 후에는 왕의 취임식, 종교 의식, 투우 경기, 교수형 등이 치러지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3번의 화재로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19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축되었다. 커다란 4층 건물이 반듯한 직사각형을 이루며 광장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데, 9개의 아치문이 광장으로 통하고 있어서 어느 방향에서든 광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광장 가운데에서 기품 있게 말을 타고 있는 기마상은 바로 펠리페 3세이다. 광장 주위를 둘러싼 건물의 1층에는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관광 안내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펠리페 3세의 동상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시설들을 설치해 놓았는데, 뜻밖에도 토트넘 축구팀의 대형 사진이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호프 손흥민도 늠름한 모습으로 뒷줄에 서 있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폭이 7~8m정도 되는 도로는 양쪽 건물의 3층 높이에서 대형 천막을 쳐서 그늘을 만들었다. 여름에는 이런 시설로 관광객들을 유혹하나보다. 이런 그늘막이 없는 곳보다 있는 도로가 걸어 다니기 한결 낫다.

 

현지인 식당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구운 생선과 감자, 빵과 샐러드가 나왔다. 빵은 딱딱해서 별로이고 샐러드도 그저 그런 맛이다. 별로 내키지 않아서 조금만 먹고 나왔다.

 

해가 아직 중천에 남아있었지만 시계는 오후 8시가 넘었다. TORRFLODONES HOTEL로 와서 015호를 배정받았다. 방은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호텔에서 100m쯤 내려가니 대형슈퍼가 있었다. 그런데 이 호텔에서는 생수도 지급하지 않아서 물은 한 병 구입해야 했다. 다행히 와이파이 사용은 무료라 집으로 카톡 문자를 보낼 수 있었다. 오늘은 제법 많이 돌아다녔구나.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눈이 저절로 감기는 것 같다.

 

 

531()

6시에 모닝콜이 들어와야 하는데 내가 못들은 것일까? 눈을 뜨니 6시 반이다. 대충 세수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호텔이 깨끗하여 호감을 가졌는데 아침 식사 준비된 것을 보니 신뢰가 더욱 커졌다. 다양한 빵과 음료수가 진열되어 있어서 어느 것을 먹어야할지 고민스러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침식사는 간단히 해야지. 계란찜, 소시지, 샌드위치, 바나나에 파인주스 한잔이면 O.K. 맛있게 먹고 나왔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버스가 바뀌었다. 같은 수준의 버스라 우리가 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버스도 일정거리를 달리면 휴식을 줘야하나??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이동하면서 박영숙 가이드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 스페인 사람들은 9시에 아침식사하고 11시반에 간식시간, 오후 2시 점심식사하면 오후 9 시에 저녁식사를 한다. 간식시간에는 티와 비스켓으로 간단하게..

* 일반직장인들은 적당히 살면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진급하고자 하는 욕망이 적 고 간부직의 T/O가 많은 편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의 땅!

* 수입의 40%를 세금으로 납부

* 7,8월은 더워서 오후 3시에 퇴근

* 톨레도는 1560년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기 전까지 스페인의 수도

* 여기 사람은 나고 자라서 죽을 때까지 한 곳을 고수하는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

* 스페인은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지만 인구의 98%는 천주교 신자.

* 중규모 이상의 도시에는 대성당이 있다.

* 오렌지, 아몬드, 올리버가 3대 특산물

* 식물성 기름 올리버

- 열을 가하지 않고 기름을 짜내기 때문에 영양소가 그대로 유지

- 혈관 속의 찌꺼기(포화지방산) 제거하므로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필수품

- 올리브는 지중해 연안국에서 재배가 되고 심은 후 30년이 지나야 식용으로 쓸 올리브 가 되지만 500년간 수확이 가능한 식물

- 세계적으로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 가기 때문에 올리브 농사는 후손을 위한 투자

 

톨레도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에서 남남서쪽으로 67떨어진 지점에 있다. 타호 강으로 돌출하여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인 암석질의 갑에 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이 도시를 가리켜 '우르브스 파르바, 세드 로코 무니타'(작지만 천연의 요새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기록했다. BC 193년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에게 정복된 후 톨레툼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주요 식민지이자 카르펜티아의 중심지가 되었다. 6세기에는 서고트 왕국의 왕궁 소재 도시였다. 도시가 암석지대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소코도베르를 중심으로 펼쳐진 시가지가 좁고 구불구불하며 경사가 가파르고 지면이 울퉁불퉁한 것이 특징이다. 산중턱에 위치한 시내로 편하게 올라가기 위하여 높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 놓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시간만 10분 정도 걸렸을 것 같았다. 오래된 현대식 건물이 보기 좋게 서 있었다.

 

박영숙 가이드의 묘기가 발휘되었다. 여기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우리가 선택한 톨레도 미니열차관광이 시작되는 10시에 예약을 해 둔 것이다. 시간이 될 때까지 계단 아래 길 한복판에 설치된 세르반테스청동상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우리 팀은 10시 정각에 도착한 첫차를 타고 관광에 나섰다. 여기 톨레도는 타호강이 U자형으로 감아 돌면서 흐르는데, 이 시가지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맞은편 언덕이라 그 언덕까지 미니열차를 타고 가서 톨레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미니열차는 앞부분을 열차처럼 만들고, 소형버스 2량을 달고 다니는 기차형식의 버스다. 기존도로가 좁기 때문에 폭은 2m쯤 되려나. 3명씩 앉도록 되어있었다.

가이드는 버스에서 보이는 유명 건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해 주었다.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도시라 오래된 유적들도 보이고, 수백 년 된 건물들도 많이 보인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인류문화유산으로 보호를 받을 만하다. 그리고 정말 이 도시는 타호강이 천혜의 방어막 역할을 하고 있구나.

20분 정도 달려서 톨레도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까지 왔다. 전망이 참 좋다. 열차에서 내려서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는 우리나라의 지성과 이보영이 웨딩촬영을 하면서 더욱 각광을 받게 된 곳이라고 한다. 나도 셀카와 카메라를 이용하여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사실 혼자서 여행 다니면서 가장 불편한 점은 사진을 부탁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인천에서부터 동행했던 김숙영 가이드가 사진을 몇 장 찍어주었다. 처음 미니열차를 탔던 곳으로 돌아오니 이 열차를 타기 위하여 관광객들이 긴 행열을 이루고 있었다. 가이드를 잘 만나야 여행이 즐겁다니까~~

 

미니열차 투어를 마치고 톨레도 대성당으로 걸어갔다. 톨레도 골목길은 보통 300, 400년 된 건물들이다.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수리를 할 수도 없다. 오래된 고택이라 모든 것이 불편해도 그냥 그렇게 안주하며 살고 있다. 1층 상점에는 기념품 파는 매장이 많았다. 옛날 입던 갑옷, 수십 종류의 칼, 복잡한 문양이 들어있는 접시, 쟁반, 각종 인형, 부채, 주방용품, 온갖 악세사리....

 

톨레도 대성당은 외관에서부터 웅장함을 자랑한다. 성당을 이렇게 웅장하게 지은 이유는 옛날에는 종이가 귀하고 비싸기 때문에 성경책을 많이 만들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성당이 바로 성경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성당에 들어오면 저절로 성경 공부가 되도록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고 한다. 박영숙 가이드가 입장권을 구입해서 함께 들어갔다.

성당 안에서도 박영숙 가이드의 해박한 지식은 우리를 즐겁게 했다. 심하게 말해서 성당 내부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성당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일부 구역은 귀족이 분양을 받아 개인 기도실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 울타리 모양으로 출입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곳은 성당 내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로 예수가 탄생하신 곳이라고 한다. 중간에 보관되어 있는 돌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얘기도 해주면서 만져보라고 한다. 무슨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지 중앙 홀은 안전난간으로 막아놓았다. 어떤 방은 역대 주교와 추기경의 초상화를 걸어놓았고, 다른 방에는 예수와 성모마리아의 일생이 그려진 프레스코화도 있다. 또 천당과 지옥의 그림도 그려져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거꾸로 그려놓은 그림도 있다. 마치 유명한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이 성당의 가장 귀한 보물은 16세기 초 엔리케 아르페가 만든 성체 현시대(Custodia)이다. 4명의 천사가 받치고 있는 성체는 5,000개의 금 은 보석으로 만들어져 무게가 무려 180kg, 높이가 3m가량 된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보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톨레도 성당을 나와서 산토 토메 교회로 갔다. 이 성당은 14세기에 재건된 무데하르 양식의 탑이 있는 성당으로, 톨레도에서 작품 활동만 40년 이상 해 온 종교화의 대가인 엘 그레코의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교회 건물은 조그마하지만 이 그림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방문하고 있는데.... 오르가스 백작은 14세기 인물로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산토토메 교회의 최고 후원자였으며 가난한 신자들에게 많은 은덕을 베푼 인물이며 평생 남을 도우며 약자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재산을 헌납 받은 교회는 답례로 엘 그레코에게 의뢰하여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라는 유명한 그림을 남겼고, 이 그림은 실제 백작의 무덤 위에 걸려있다. 가로 360cm, 세로 460cm의 대작이다. 여기도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하였다.

 

근처 식당으로 가서 현지식 식사를 했다. 야채샐러드와 스테이크가 나왔는데, 서양 사람들의 스테이크는 정말 맛이 없다. 샐러드와 감자만 조금 먹고 스테이크는 반도 못 먹었다. 가이드가 포도주를 한 병씩 테이블에 올려놓았는데 포도주는 두 잔이나 마셨다.

 

톨레도 구경을 마치고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버스 타는 곳까지 내려왔다. 어째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내려올 때 탄 에스컬레이터는 오래전에 설치된 1호이고, 올라갈 때 탔던 것이 새로 만든 2호라고 한다.

잠시 시간을 할애하여 톨레도 쇼핑센터로 갔다. 여기는 값이 제법 나가는 고급올리브 오일, 까마돌리 크림 등을 팔고 있었다. 관심품목이 아니어서 눈으로 구경만 하고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인 파티마로 향했다. 세계 3대 성모 발현지로,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 하는 포르투갈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포르투갈로 국경을 넘어가지만 여권검사 이런 것은 없다. 1시간의 시차가 있어서 시계바늘을 조정해야 한다. (3대 성모 발현지는 포르투갈의 파티마 성지, 프랑스의 루르드 성지, 멕시코의 과달루페 성지를 가리킨다)

버스 안에서 김숙영 가이드는 파티마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파티마가 성모 발현지로 인정받은 과정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나도 관심 있게 시청했다.

성모 발현의 역사는 191751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 명의 어린 목동 루치아(10), 야신타(7), 프란시스쿠(9)의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서 세 가지 예언을 했고, 죄인들의 회개 기도와 로사리오에 대한 기도를 당부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비밀을 굳게 지켰지만, 성모 마리아가 매월 13일 여섯 차례 나타난다는 소문이 나면서 13일이 되면 몇 천 명의 신도들이 이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포르투갈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라면서 아이들은 감금됐다. 성모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발현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성모가 나타나기로 한 마지막 날인 1013, 자리에 모인 약 7만 명의 사람들 앞에 거대한 빛이 나타나면서 성모 발현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처음에는 성모 발현과 예언을 교황청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1930년 레이리라 주교가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성모 발현지로 인정하였고 파티마는 세상에 알려지면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전국적인 규모의 파티마 성지순례는 1927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1928년에 바실리카가 건축되기 시작했고, 1953년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65m 높이의 탑 위에 거대한 청동 왕관과 수정 십자가가 있으며, 교회당의 양측면에는 병원과 피정의 집이 있고, 정면에는 작은 성모 마리아 출현 예배당이 있는 거대한 광장이 있다.

이 영화를 보고서야 파티마에 대하여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야신타와 프란시스쿠 남매는 2년 후에 사망하여 천국으로 올라갔고, 루치아는 수녀가 되어 2005년까지 생존하였다. 그들은 모두 파티마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4시간 30분쯤 걸려서 ‘CASA SAO NUNO HOTEL’에 도착하였다. 225호를 배정받아 가방을 들여놓고 가이드 인솔 하에 모두 파티마성당으로 갔다.

1917513일부터 1013일까지 성모님께서는 매월 13일에 세 아이들, 프란치스코(1908~1919)와 히야친타 마르투(1910~1920) 남매, 루치아 도스 산토스(1907~2005)에게 나타나셨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의 주된 내용은 세계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와 희생 및 보속을 하고,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자신을 봉헌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발현 때마다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당부하셨다.

파티마 광장에는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던 장소에 성모발현 경당이 있고, 그 안에 평화의 상징으로 왕관을 쓰신 마리아상이 모셔져 있다. 그 외에도 광장 주변에는 순례객들이 기도할 수 있는 여러 경당과 공간이 잘 조성돼 있다.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드넓은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묵주기도를 통해 올리는 기도가 밤낮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광장 동쪽 끝에는 1954년에 완공된 네오 바로크 양식의 로사리오 성모 대성당이 우뚝 서 있다. 이 성당의 규모는 500여 명이 들어갈 정도로 그리 크지 않지만, 성모님의 생애와 관련된 성화로 장식돼 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자 교회는 신자들이 보다 편리하게 미사참례를 할 수 있도록 큰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공모전을 열었다. 인도 뉴델리 태생으로 그리스의 저명한 건축가가 된 알렉산드로스 톰바지스의 설계가 1996년 채택돼 2004년 공사가 시작됐다. 새 성당의 이름은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기 위해 삼위일체 성당으로 붙여졌다.

성모신심이 돈독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의 베드로 사도 무덤에 있던 대리석을 하나 보내 이 성당의 초석으로 삼게 했다. 흰색 돌을 쌓아서 만든 성당의 축복식은 20071012일 파티마 성모 발현 90주년 폐막식 때 거행됐다.

현대식 새 성당은 로사리오 성모 대성당 맞은 편 광장 서쪽 끝에 세워졌는데, 단순하고 소박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기존에 지어진 성모 대성당보다도 훨씬 커서 9000여 명의 신자들이 한 번에 미사에 참례할 수 있으며 장애인들을 위한 자리도 마련돼 있다. 이 성당의 길이는 95m, 폭은 115m, 높이는 20m이다. 또한 이 성당에는 소그룹이 미사를 봉헌하거나 기도할 수 있도록 여러 부속 경당과 고해소도 마련해뒀다. 이 성당은 원형 모양이며 자연 채광을 최대한 살려 은은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을 준다. 원형은 하느님의 진리가 시작이나 끝도 없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둥근 성체 모양인 외관은 예수님 사랑의 절정이기도 한 성체성사를 상징하기도 한다. 백색은 성모 마리아께서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고 탄생하여 참되게 사시다가 온전히 천상에 오르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당 내·외부의 성상들은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만들었는데, 성당 앞에 높이 34m, 17m 규모로 세운 강철 십자고상은 독일 조각가 로베르트 샤드의 작품이다. 성당 입구에는 묵주기도를 자주 바치라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묵주가 걸려 있다. 그곳을 따라 들어가면 순백색 제단과 금빛 제단화, 십자고상, 성모상 등과 마주하게 된다

성당 내부는 완만하게 경사져 제단 부분은 가장 낮은 곳에 배치돼 있다. 그래서 신자들은 부드러운 원형으로 배치된 자리에 앉아 제단을 편안히 바라보며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제단의 십자고상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은 우리 주변의 사람처럼 만들어져 친근함을 더해 준다. 제단 벽면을 장식한 금빛 모자이크에는 세상 종말에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성모 마리아와 수많은 성인이 묘사돼 있다. 제단화가 금빛으로 장식된 것은 주님의 가르침이 영원불변한 것이고, 파티마에서 알려주신 성모님의 메시지는 참으로 값지다는 것을 나타낸다.

삼위일체 성당은 기존의 로사리오 성모 대성당과 마주보면서도 서로 충돌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옛 건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게 지어진 이 성당은 광장 주변에 있던 다른 건물을 가리지 않고 오히려 광장을 더욱 포근하게 만들어 준다. 새 성당과 옛 대성당은 각각 광장 끝에 있지만 연인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다가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했다. 현지식이 내 입맛에 맞을 수는 없지. 푸석하나마 쌀밥이 있기에 샐러드 한 접시와 가지고 온 멸치와 고추장으로 반쯤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혼자 다시 성당으로 가서 미사에 참석했다. 여기서는 매일 저녁이면 세계 각국에서 모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사를 집전한다고 한다. 오늘도 이 성당에 500명은 넘을 것 같은 많은 신자들이 모였다. 천주교의 미사는 세계 어디서나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신부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눈치껏 이해는 할 수 있다. 멀찌감치 뒤에 서서 30여분 미사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나왔다.

근처에는 성당용품 파는 가게가 엄청 많다. 여기 파티마까지 왔는데, 천주교 신자로써 그냥 갈 수는 없지. 조그만 성모 마리아와 묵주를 하나 샀다.

 

이 호텔방의 샤워공간이 너무 작다. 가로 세로 각 70cm는 될까. 체격이 작은 나도 상체를 움직이기조차 곤란한데, 덩치 큰 서양 사람들은 어떻게 사용하지? 대충 땀만 씻어내고 자리에 들었다. 휴대폰의 만보계에서 13,200보를 걸었다고 표시가 되어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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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가 전날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내일은 6,7,8입니다이렇게 얘기하면 6시에 모닝콜, 7시에 식당, 8시 출발 이렇게 진행된다. 오늘도 6시에 전화기 알람소리에 눈을 떠서 가방 챙겨놓고, 7시에 식당으로 내려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이 호텔도 아침 식사메뉴는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빵과 요플레, 파인주스 등으로 가볍게 식사를 했다.

 

오늘은 유럽 최서단 땅끝마을 까보다로까구경하고 리스본 관광을 한 후 세비야까지 가는 일정이다. ‘까보다로까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박영숙 가이드는 얘기 보따리를 풀었다.

* 포르투갈은 돌이 많은 나라. 석재로 도로 포장을 하는 경우도 있음

* 햇살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외출 시에는 반드시 선그라스 착용할 것

* 이 곳 사람들은 대체로 오지랖이 넓어서 오만가지 간섭(?)을 다 한다. 그리고 친절하다.

* 보통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한 곳에서 집중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15년을 얼굴 을 맞대고 생활하게 되고 아주 긴밀한 관계가 형성된다.

* 공립학교는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 사립학교는 주로 수도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의무적으로 부모가 등하교 시켜줘야 한다. 사교육은 없다.

* 광장을 중심으로 학부모들이 모여서 수다를 떰. 유일하게 중국 사람을 싫어하는 편임.

* 포르투갈은 코르크가 많이 생산되는 나라다. 세계 코르크의 70%를 생산한다고 한다.

* 1785년 포도주를 처음으로 상품화하였다. 도수가 높고 당도도 높아 인가가 많다.

* 델타커피가 유명한데, 브라질을 식민지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수탉이 유명.

* 태양이 좋아서 일조량이 부족한 유럽인들에게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까보다로까에 도착했다. 붉은 등대가 최서단 땅끝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서 있다. 관광버스가 6대 있는데, 두 대가 한국관광객을 태운 버스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구나.

까보다로까는 대서양을 품은 아름다움 때문에 일찍이 영국과 스페인 귀족들의 여름 휴양지로 사랑 받아 왔다. 지금도 신트라에서 굽이굽이 까보다로까로 올라가는 산중턱에는 유명인들의 별장이 좋은 전망을 가진 위치에 간간히 숨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 끝에 서 있다는 사실은 여행객들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벅찬 경험이 될 것이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던 시대의 사람들은 여기가 땅의 끝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여기는 강한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고 하더니만 오늘은 고요하다.

까보다로까는 포르투갈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최대의 관광명소지만 규모가 작은 만큼 볼거리나 편의시설이 많지 않다. 유럽에서 3번째로 오래되었다는 이곳의 상징 빨간 등대와 기념품을 파는 작은 가게 1, 그리고 대서양을 마주하고 선 십자가 돌탑이 전부다. 십자가 돌탑에는 유럽 대륙의 서쪽 끝, 위도 3847, 경도 930, 고도 140m’가 표시되어 있다. 무탈하게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은 이 돌기둥에 서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으리라. 내려다보이는 바다가 대서양이다. 물맛이라도 한 번 볼까했더니 주변이 모두 절벽이어서 내려가는 길이 안 보인다. 이 바다를 건너면 아메리카 대륙이구나. 미국 해안까지 5,000km나 된다고 한다. 내가 이 바다를 건널 기회가 있을까?

 

40분쯤 달려서 포르투갈의 수도로 800년의 역사를 지닌 리스본으로 왔다. 리스본은 기쁨의 낙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7개의 언덕으로 구성되어 있고, 부자들은 마차를 이용할 수 있어서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단다. 1755년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는데, 그 후 도시 재건사업을 벌여서 지금의 형태로 만들었다.

1926년 군사쿠데타로 왕정은 무너지고 1932년 살라자르가 총리에 올라 33년간 장기집권을 하였다.

타구스강(라틴어: Tagus)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강으로, 타호강(스페인어: Tajo) 또는 테주강(포르투갈어: Tejo)으로도 불린다. 총 연장은 1,038km로 이중 716km는 스페인, 47km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을 흐르며, 나머지 275km는 포르투갈을 흘러 리스본에 이르러 대서양으로 빠져나간다. 리스본을 관통하는 테주강은 오래 전부터 포르투갈의 역사 그리고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을 조용히 지켜본 목격자와도 같다. 그리고 우리의 한강처럼 리스본 시민들의 가족 나들이 장소이자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버스는 테주강변에 우리 팀을 내려주었다.

 

멀리 보이는 현수교는 ‘425일 다리이다. 1966년에 완공된 이 다리는 2,278m로 독재자 살라자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것을 1974년 무혈혁명 이후 ‘4.25다리라고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LA의 금문교를 설계한 회사가 건설했기에 금문교와 많이 닮았으며 그 오른쪽에 예수상이 있다. 이 예수상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에게 선물했다는 거대한 그리스도상이다. 양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브라질의 거대 그리스도상을 닮았다. 이 다리를 경계로 구리스본과 신리스본으로 나뉜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건설하였는데 동상대좌의 탑 내부에 엘리베이터도 있다고 한다.

 

테주강변에 우뚝 서 있는 '발견 기념비'는 강변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자 랜드마크이다. 포르투갈을 해양 제국으로 일으킨 '엔리케' 왕자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여 1960년에 세워진 범선 모양의 현대적인 기념비이다. 측면의 섬세한 조각상이 인상적인데, 포르투갈의 지난 역사에 대한 그리움과 자부심이 담겨져 있다. 탑에 새겨진 조각을 보면, 엔리케 왕자를 선두로 해양 활동을 수행했던 탐험가와 기사와 천문학자, 선원과 선교사 등이 줄지어 있다. 특히 마젤란, 바스코 다 가마, 콜럼부스 등 '영웅'으로 칭송받는 '대항해 시대'의 인물들이다.

 

발견 기념탑을 지나서 강을 따라 서쪽으로 쭉 걷다 보면 독특한 건축물이 보이는데, ‘벨렘 탑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기재된 이 탑은 '항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마누엘 양식의 건축물로, 1515년 마누엘 1세가 항구를 감시하기 위해 테주강변에 세운 요새였다. 바다와 강이 이어지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시 인도나 브라질 등으로 떠나는 배가 통관 절차를 밟기도 했던 곳이며, 해외 항해에서 돌아오는 배를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처음 지어졌던 당시에는 탑의 1층은 물이 차올랐다 빠지기를 반복했었다고 한다. 이를 이용(?)하여 고문을 할 수 있기에, 1층은 감옥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테주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1층이 물에 잠기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이 탑이 우리에게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를 향해 출발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도로를 건너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구경했다. 많은 사람들이 입장하기 위하여 줄을 길게 서 있었지만, 우리는 외관만 구경하도록 되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이 수도원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을 기념으로 하여 세웠으며 식민지 운영을 통해 벌어들인 핏빛 재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1498년에 마누엘 1세가 지시하여 첫 삽을 뜬 후 약 170년에 걸쳐 지어져 완공되었다. 포르투갈의 야자수를 모티프로 형상화한 화려한 장식이 인상적인, 마누엘 양식의 대표작으로써 현재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수도원과 산타마리아 성당에는 포르투갈의 자랑해 마지않는 그들의 영웅 '바스코 다 가마'와 포르투갈의 민족시인 카몽이스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점심 식사하러 현지 식당에 들어갔다. 오늘은 포르투갈 사람들의 주식으로 먹는 볶음밥(?)이 나왔다. 생선도 한 토막 나왔지만 맛은 별로다. 빵 한 조각에 야채샐러드, 감자, 오렌지 등으로 배를 채웠다. 올리브기름을 뿌려 먹으면 맛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동물성이든 식물성이든 기름 종류를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 기름에 튀긴 통닭도 일정량 이상 먹으면 희한하게 배탈이 나기 때문에 즐거운 여행을 지속하려면 언제 어디서나 음식을 가려서 조심조심 먹어야한다.

 

식사를 마치고 선택 관광 리스본툭툭이를 타러 갔다. 이 상품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김숙영 가이드와 함께 근처 공원을 산책하도록 되어 있었다. 8명이 신청하여 툭툭이 2대를 이용하여 리스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가장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여기에 올라오니 오전에 우리가 둘러보았던 4.25다리 주변의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 같은 산은 없고 해발 100m남짓한 언덕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 경치구경을 하면서 사진도 제법 찍었다. 툭툭이는 시내로 내려가서 전차가 다니는 도로를 질주하기도 하고, 골목길로 들어가서 요리조리 다니기도 하고, 태주강변을 둘러보기도 하면서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시내에는 가로수로 자색꽃이 만발한 자카르타나무가 많이 심어져있다. 마치 벚꽃처럼 풍성하게 피어서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툭툭이를 1시간쯤 탔나보다. 그렇지만 이정도로 60유로(78,000)를 받는 것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2018년까지 선택 관광은 40유로라고 나오고, 자유여행을 한 사람은 6인승 한 대를 불렀는데 1시간에 60유로를 지불했다고 적혀있다. 선택 관광의 요금차이로 현지 가이드에게 수당을 지급하나보다.

 

리스본 관광을 마치고 4시간 30분을 달려 스페인의 세비야로 이동했다. 버스 안에서 이번에는 치유자의 길’ CD영화를 보여주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네 가지 코스가 있는데 가장 대중적인 길은 800km를 걷는 프랑스 길이다. 아버지는 미국의 의사이지만 아들은 아버지와 생각이 많이 달라 부자간 의견충돌이 심했다. 아들이 집을 나가 이 순례자의 길에 도전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이틀 만에 사망하고 만다. 아들의 비보를 접한 아버지는 병원을 접어두고 아들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화장한 아들의 넋을 배낭에 담고 아들 대신 순례자의 길을 완주한다는 내용이다. 감명 깊게 보았다. 나도 한 번 도전해 봐?

오는 도중에 휴게소에 들렀을 때는 스타우트(흑맥주)를 한 병 사서 마셨다. 맥주는 선호식품이 아니어서 잘 마시지 않았지만 막걸리가 없으니 맥주라도 사서 목을 축여야지~~

 

CLIENTES HOTEL 308호를 배정받았다. 가방을 숙소에 두고 호텔 식당으로 내려와서 저녁식사를 했다. 야채샐러드 한 접시와 감자, 스테이크를 조금 먹었다. 오늘도 테이블에 와인이 한 병씩 놓여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정말 술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한 잔을 비우고, 남은 와인은 가지고 다니던 포터에 담았다. 나중에 숙소에서 혼술을 즐겨야지...

식사를 다 마쳐도 아직 해는 중천에 남아있다. 오늘은 손흥민의 토트넘과 리버풀의 유럽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벌어지는 날이다. 그런데 이 호텔에는 중계방송을 볼 수 있는 TV가 없다. 유료로 방송하기 때문에 카페나 술집에 가서 봐야 한단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일단 밖으로 나왔다. 해변으로 가니 술집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축구를 관람하고 있었다. 밖에서 보니 시작한지 5분도 안 되었는데 토트넘이 0:1로 지고 있는 것이다. 분위기도 소란하고 담배연기가 싫어서 그냥 해변으로 내려갔다.

백사장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엄청 길고 넓었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아직 바닷물에서 노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지 짐을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여기서 지중해의 석양을 감상하다니!!! 10분 사이에 하늘을 붉게 물들이더니 이내 언덕 밑으로 사라진다. 여기서는 바다가 북쪽이고 서쪽은 나지막한 언덕인데 그 언덕 너머로 태양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수평선으로 지는 해를 볼 수 있었다면 더욱 황홀했을 텐데....

숙소로 올라왔다. 아직 무덥지는 않았지만 이 방에는 에어컨이 없다. 내가 걱정할 부분은 아니지만 여름에는 손님을 어떻게 받으려고? 샤워를 하고 나서 식당에서 가지고 온 와인을 거룩하게 한잔하고 자리에 들었다. 20,700보나 걸었구나. 제법 많이 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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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6시 모닝콜, 7시 식사, 8시 출발로 진행되었다. 아침식사는 계란 후라이를 만들어 주는 요리사가 있어서 2개나 먹었다. 여러 가지 햄도 구비되어 있어서 빵과 같이 몇 장 먹었다. 주스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내 체질에 맞는 파인주스를 한 잔 마시니 거뜬하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차창으로 황금의 탑을 보았다. 근처에 내려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도록 해 주면 좋으련만 그냥 눈으로만 보고 통과해 버린다. '황금의 탑'이라는 뜻을 지닌 이곳은 세비야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탑으로 1220년 무어인들이 과달키비르 강을 통과하는 배를 검문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며 강 건너편에는 은의 탑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두 탑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세비야에 들어오는 배를 막았다고 한다. 이후 황금의 탑은 감옥, 예배당, 화약 저장고 그리고 항구의 관리 사무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다. 황금의 탑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처음 탑을 지을 당시 금 타일로 탑의 바깥을 덮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16~17세기에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을 이곳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16세기 황금의 탑은 방치되었다가 1755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큰 피해를 입었고 1760년대에 수리 및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으며 이 탑은 18세기와 19세기 두 차례에 걸쳐 개발업자들에 의해 헐릴 위기에 처했으나 두 번 다 반대 여론으로 무산됐다. 현재 이 탑에는 작은 해양 박물관이 있다.

 

하필 일요일이라 세비야 대성당은 관람이 불가능하다.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르네상스 양식),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네오르네상스 양식)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고딕 양식 성당 중에서는 세비야 대성당이 가장 크다. 1401년 성당 참사회의 그 어떤 다른 성당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크게 지어 이 성당이 마무리되면 성당을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해야 한다.”라는 결정으로 무조건 톨레도 대성당보다 크게 지어야 한다며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짓기 시작해 105년 후인 1506년에 완공된 세비야 관광의 핵심이다. 대성당 종탑인 히랄다 탑은 오렌지 정원과 함께 유일하게 남은 12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의 한 부분이다. 17~18세기에 들어와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추가되면서 여러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관이 있다

이런 성당을 구경하지 못하게 되어 많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다. 밖에서도 볼 수 있는 히랄다 탑은 높이가 97.5m로 전망대가 있어서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전망대를 오르는 길은 계단이 없는 대신 왕이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게 완만한 나선형 비탈길로 되어 있다고 한다. 세비야의 상징으로 지진으로 파손된 것을 16세기의 기독교인들이 수리하면서 그 위에 전망대와 풍향계를 설치하였다. '바람개비'라는 뜻의 히랄다라는 이름도 그 때 붙여졌다고 한다.

 

스페인광장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정말 휘황찬란한 타일로 대형벽화를 만들어놓았다. 어쩌면 이런 타일을 다 만들어낼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광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적 수준, 국가의 품격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마리아 루이사 공주가 1893년 산 텔모 궁전 정원의 반을 시에 기증하면서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루이사 공원이 만들어졌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 안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손꼽히는 스페인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1929년 라틴 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당시 본부 건물로 지어진 건물은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고, 건물 양쪽의 탑은 대성당에 있는 히랄다 탑을 본 따 만들었고, 건물 아래층 반원을 따라 타일로 장식된 곳은 스페인 모든 도시의 문장과 지도,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여 준다.

 

스페인광장에는 실제 말이 끄는 마차를 탈 수 있다. ‘세비야 마차투어선택 관광에는 일가족 4명만 빠지고 나머지는 모두 신청한 것 같다. 스페인광장에서 마차를 타고 마리아 루이사 공원길을 따라 폼 잡으며 주변 경치를 구경했다. 알카사르 궁전까지 약 50분간 마차를 탔다. 그런데 이것도 1인당 50유로는 너무 비싸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19년 자유여행으로 온 사람들 4명이 45유로에 1시간을 마차를 타고 시내 구경하였다고 나온다. 인원수가 아니라 마차 한 대에 45유로라는 얘기다. 그렇지, 그 정도라면 적당하지. 다른 여행사의 스페인 포르투갈 관광 상품도 비슷한 금액으로 책정되어 있다. 여행사들이 담합을 한 모양이다. 여행사들의 횡포(?)라 해야 하나?

 

세비야 대성당 내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외관만 구경하기로 되어 있었던 알카사르 궁전을 관람할 수 있었다. 박영숙 가이드가 입장권을 구하러 가면서 외관을 구경할 수 있도록 20분 정도의 시간을 주었고, 11시 반에 지정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곳저곳 구경을 하고 지정장소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60대 자매가 안 보이는 것이다. 시간을 자꾸 흘러가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관광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박영숙 가이드는 우리와 함께 입장하고, 김숙영 가이드가 남아서 계속 찾기로 했다. 우리는 궁전으로 들어가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행불(?)된 두 사람 때문에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궁전 구경을 하며 제법 시간이 지났을 때 저쪽에서 오고 있는 김숙영 가이드와 자매를 만날 수 있었다. 자매는 11시 반까지 지정장소로 오라는 가이드의 헤드폰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도 우리 팀을 만나지 못해서 서울 집과 여행사에 전화를 하는 등 나름 고생을 했고, 마차에서 내린 장소에서 꼼짝하지 않고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우리 눈에 안 띄었을까? 어쨌거나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패키지여행에서 이런 불상사가 생기면 모두 피곤하다. 낙오되지 않도록 가이드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알카사르 궁전은 무슬림문화의 집대성이라고나 할까. 온갖 종류의 Tile로 실내장식을 해 놓았다. 아니 어떻게 tile로 이런 문양을 만들어 낼 수가 있지?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외부 정원도 멋지게 꾸며 놓았다.

원래는 1170년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진 성이었던 자리에 잔인왕이라고 불렸던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페드로 1세가 그라나다의 알암브라 성을 보고 반해 그라나다와 톨레도에서 이슬람 장인들을 불러 모아 무데하르 양식의 궁전을 짓게 했다. 대성당과 가장 가까이에 인접해 있는 사자의 문(Puerta del León)’을 통과하면 작은 정원을 지나 페드로 1세 궁전이 보이는 파티오 델 라 몬테리아(Patio del la Monteria)’가 나오고 이곳을 통과하면 세비야 알카사르의 하이라이트인 페드로 1세 궁전 안에 자리한 아가씨의 파티오가 나타난다. 페드로 1세가 이슬람 장인들을 불러 모아 그라나다 알암브라 성의 나스르 궁전을 모티브로 만든 곳으로 무데하르 양식의 절정을 볼 수 있다. 중앙 연못을 기준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파티오를 둘러싸고 있는 페드로 1세 궁전 내 대사의 방은 우주를 상징하는 천장 무늬의 화려함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 무어인들이 왕궁으로 사용하기 위해 짓기 시작했지만, 완성하기도 전에 국토 회복 운동으로 정복되면서 1328년 알폰소 11세에 의해 남아 있던 무어인들이 완공시킨 궁전 겸 요새이다.

 

문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미역국과 두루치기에 감자볶음과 김치가 나왔는데, 반찬이 다 좋았지만 특히 미역국 맛이 정말 일품이다. 어떻게나 맛이 있던지 아들처럼 보이는 종업원에게 한 그릇 더 달라고 했더니 큰 대접에 가득 담아 와서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인심도 좋네. 식당주인은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원래 조그마하게 식당을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몰리다보니 이렇게 규모가 있는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메뉴를 보니 떡뽁이, 비빔밥, 육개장, 제육볶음, 찜닭 등등 10~15유로 정도 가격이다. 이런 식당은 소문을 내 주어야지. 홀 벽에 아기한복을 예쁘게 걸어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론다로 떠나기 앞서 건강식품 파는 가게에 들렀다. 송로버섯 소금, 꿀국화차, 폴리코사놀, 로얄젤리꿀, 뚜론 등을 팔고 있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내 체질에 맞는 상품이 아니어서 구경만 하고 나왔다.

 

두 시간쯤 달려서 론다로 왔다. 말라가에서 북서쪽으로 113km 떨어져 있는 도시로 말라가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세계적인 작가 헤밍웨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 말했을 정도로 스페인에서도 전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헤밍웨이가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이곳 론다에서 집필하였다고 한다. 안달루시아의 꽃이라고 일컫는 아름다운 마을 론다는 과달레빈강(Río Guadalevín) 타호 협곡(El Tajo Canyon) 위 해발 780m 고지대에 세워진 절벽 위의 도시이기도 하다. 론다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스페인을 대표하는 경기 중 하나인 투우인데, 말을 타고 창으로 찌르던 전통 투우 방식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빨간 천을 흔들어 소를 흥분시키는 방식의 투우를 창시한 곳이 론다이다.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낭만적인 협곡 도시 론다는 산책하듯 둘러보면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누에보 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에 있는 첫 번째 골목을 따라가면 캄피요 광장(Plaza del Campillo)이 나오고 광장 오른쪽 끝의 전망대까지 가면 누에보 다리와 협곡 위에 자리잡은 론다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박영숙 가이드를 따라 시내로 들어가면서 투우경기장 앞을 지나갔다. 입구에는 유명 투우사의 동상을 세워놓았고, 옆에는 성난 황소의 동상도 만들어 놓았다. 1785년에 완공된 투우장으로 세비야 투우장 다음으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중 하나이다.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고, 최대 6,000명 정도의 인원이 입장할 수 있는 규모로 오직 투우만을 위해 지어진 최초의 투우장이기도 하다. 1984년에는 내부에 투우 박물관도 만들어졌다. 이곳 론다 투우장에서 투우의 창시장 프란시스코 로메로에 의해 붉은색 천(케이프)을 흔들어 소를 흥분시키는 투우가 시작됐고, 그의 손자였던 페드로 로메로는 투우사로 지내는 동안 약 6,000마리의 황소를 단 한 번의 부상도 없이 쓰러뜨렸던 스페인의 전설적인 투우사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도 가끔 투우 경기가 열리고, 경기가 없을 때는 경기장 투어와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다.

그런데 동물보호단체들의 활동으로 스페인의 투우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소를 단칼에 죽이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면서 못하도록 해코지(?)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청도, 진주, 의령 등에서 벌어지는 소싸움이 이런 단체들의 활동으로 지자체에서 규모를 줄이거나 없애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글쎄... 전통 민속놀이로 이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즐거움을 위하여 유순한 소를 훈련시키고 싸움시키는 자체가 동물학대라고 주장하면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일중에서 상당부분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라면 매사냥이나 개싸움, 닭싸움도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인간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권투, 레슬링, 격투기 같은 것은 별 문제가 없나? 동물보호도 좋지만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시내로 들어갔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해 주는 다리가 누에보 다리. 론다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랜드마크이다. 협곡 아래 과달레빈강이 흘러 옛날부터 두 지역의 소통의 어려움이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설한 3개의 다리 중 하나이다. 당시 아라곤 지역의 천재 건축가였던 마르틴 데 알데후엘라40여 년 동안 공을 들여 1793년 완성했는데, 3개의 다리 중 가장 늦게 완공이 되어 누에보(새로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20m의 협곡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1936~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양 측의 감옥 및 고문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포로 중 몇몇은 창문에서 골짜기 바닥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 다리의 역사와 건축에 대한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리에서 보니 협곡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10분쯤 내려가니 누에보 다리를 관찰할 수 있는 마당이 나타났다. 한참을 지켜보았다. 어째서 이 다리를 건설하는데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더 내려가니 예전에 사용하던 규모가 작은 다리가 나타났다. 내려가는 길은 계속 있었지만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 올라왔다. 화려한 궁전이나 시끌벅적한 번화가는 보이지 않았지만 깎아지른 듯한 아찔한 협곡과 그 위에 지어놓은 새하얀 집들과 누에보 다리를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의 모여드는 것 같다.

누에보 다리 바로 앞 광장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악기를 울리며 지나간다. 오늘 무슨 행사가 있나보다. 인근 골목길을 돌며 아이쇼핑을 즐긴 후 미하스로 가기 위하여 버스에 올랐다.

 

론다 인근에 있는 마을인줄 알았더니 약 1시간 30분을 달려야했다. 지중해를 바라보며 언덕에 지은 집들은 흰색이 많다. 예전에는 부유층의 사람들이 벌레나 곤충들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하여 외벽에 회를 칠했는데, 그게 전통이 되어 요새도 외벽을 흰색 페인트로 마감한다고 한다. 흰색은 때가 잘 타기 때문에 사용하기 쉽지 않은데, 여기는 미세먼지도 별로 없는 청정지역이어서 괜찮은가보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마을 미하스는 푸른 바다를 끼고 산비탈을 따라 겹겹이 들어선 하얀 집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온해 보였다. 산과 바다가 주는 넉넉함으로 인해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단다. 스페인이나 유럽의 부자들이 여름 별장을 소유하고 있어 마을의 규모에 비해 고급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미하스의 인구는 50%가 외지인이라고 한다.

도착하자마자 당나귀 동상이 있고 옆에는 당나귀택시가 도열해 있는 것이 보였다. 당나귀는 느리지만 힘이 좋으니까 이런 비탈이 심한 곳에서는 교통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나보다. 당나귀 택시를 배경으로 사진만 찍어도 2유로를 지불해야 한단다.

근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무척 평온하고 아름답다. 세계에서 가장 작다는 동굴성당’(비르겐페냐)으로 갔다. 17세기에 수도원의 수도사가 큰 바위에 동굴을 파서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에 마을의 수호성녀 페냐가 모셔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바위를 쪼아서 만든 흔적이 고스란히 있고 작은 제단과 성모상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미사를 드린다는데 내부가 좁아 철제 흰색의자가 몇 개 놓여있었다. 이곳에 성당이 지어진 유래는 한 수도사가 미하스의 성벽에서 성모 마리아상을 발견했다고도 하고, 후앙과 아순시온 베르날 자매가 바위를 쪼는 비둘기를 보고 그 자리를 파니 성모 마리아상이 나왔다고도 한다. 어찌 되었든 바위 속에서 성모상이 나왔다는 것인데 이슬람교의 무어왕조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800년 동안 바위 속에 숨겨져 있던 성모상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바위를 뚫어 성당을 짓고 바위의 성모 은둔지라고 불렀다.

 

1시간 40분을 달려서 그라나다 'BS CAPITULACIONES HOTEL'에 도착했다. 234호를 배정받아 가방을 들여놓고 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닭고기, , 오징어튀김, 감자 등을 야채샐러드와 함께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선택 관광 그라나다 야경투어를 즐기기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라나다가 유명한 이유는 1492년에 멸망한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 알함브라 궁전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라나다 왕국이 아라곤 왕국에 항복함으로 인해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이슬람 시대도 막을 내렸지만 이슬람 문화의 잔재는 도시 곳곳에 남아있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이슬람 나스라 왕조가 왕궁으로 사용한 알함브라 궁전이다. 이 궁전의 야경을 보기 위하여 버스에서 내려 산 니콜라스 전망대로 올라갔다. 가는 길은 울퉁불퉁 자갈과 보도블록이 깔려있었다. 이런 길을 걷는 것도 운치가 있구나. 20여분 올랐을까. 넓은 광장에는 테이블이 놓여있고 많은 사람들이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여기가 산니콜라스 전망대인가보다. , 알함브라 왕궁의 붉은 불빛이 주변 도시의 야경과 더불어 너무나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왕궁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포즈를 취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나도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인증샷을 남겼다.

올라왔던 길과 다른 길로 내려갔다. 다양한 문양의 접시, 등 기구, 옷가지 등등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가게가 늦은 시간이지만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 팀의 어떤 줌마님은 헐렁 바지를 한 벌 사면서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조그만 카페에 들어갔다. 감자와 과일 안주를 시켜 맥주를 한 잔 마시니 너무 시원하다. 여행을 하면서 이런 소소한 즐거움은 분명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그렇지만 이렇게 두 시간 정도 관광을 하는데 1인당 50유로(65,000)면 너무 비싸다. 실제 돈이 들어간 것은 버스기사와 가이드의 오버타임과 카페에서 맥주 한 잔 한 것뿐이었는데 이렇게 비싸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숙소로 돌아오니 밤12시가 다 되어간다. 얼른 샤워를 하고 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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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늦게 귀가한 관계로 30분 늦게 모닝콜이 들어왔다. 잠이 부족했는지 일어나는데 약간 부담이 되는 것 같다. 식당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여기 식당에도 계란후라이를 만들어 주어서 2개나 먹었다. 요플레도 있네. 집에서 먹던 요플레에 비하면 입맛에 약간 맞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알 함브라 궁전으로 갔다. 관광객이 너무 많이 찾아오는 바람에 건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장객을 1/10로 축소해 버렸단다. 또한 여기는 입장하는 절차도 까다롭다. 이름이 적힌 티켓을 받아 입장하면 무작위로 몇 사람을 선택하여 여권과 대조를 하는 것이다. 유럽에는 테러분자들이 많기 때문에 사고 방지를 위하여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 조금 불편하지만 안전을 위한 일이라 적극 협조하였다.

많은 건축가들은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예술 건축물로 동양의 타지마할과 서양의 알함브라 궁전을 꼽는다. 둘 다 이슬람 건축물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 시내 어디에서나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요새다.

알함브라 궁전은 알카시바, 헤네랄리페, 카룰로스 5세 궁전, 나스로 궁전 이렇게 4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옛날 대포가 전시되어 있는 길을 따라 가면 알카사바 성채를 만난다. 성채로 들어갈 때 입장권을 보여주어야 한다. 성채로 올라가서 가장 높은 벨라 탑에 오르면 그라나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마을은 무척이나 환상적이다. 새하얀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터를 잡고 있는 이곳이 바로 그라나다의 정신과 영혼을 담고 있는 이슬람 마을 알바이신이다. 성채에는 건물을 지었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 통로를 제외하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제한해 놓았다.

다음으로 카룰로스 5세 궁전으로 갔다. 구역을 옮길 때마다 입장권을 보여줘야 했다. 국왕 까를 5세가 신혼여행 왔다가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여 1층만 완성했는데 까를 5세가 죽고 난 뒤에 2층이 완공되면서 1,2층은 건축양식이 다르다. 지름이 50m는 더될 것 같은 복도형 원형 건물이다. 3m마다 돌기둥을 세워놓았고 복도 벽에는 화려하고 다양한 조각을 새겨놓았다. 높이 4m쯤 될 것 같은 돌기둥은 마치 콘크리트 기둥처럼 여러 모양의 자갈이 보인다. 이런 돌은 나도 처음 본다. 이 궁전 내부를 관람하려면 3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단다. 어째 알맹이는 놓치고 껍데기만 본 기분이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왕실예배당은 1505년에 착공하여 1521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문이 잠겨있는 것으로 봐서 내부관람은 안 되나보다.

엄청나게 넓게 조성된 조경은 정말 압권이다. 특이하게 생긴 사이프러스나무가 정원을 더 아름답게 장식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멋진 조경을 여기 말고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다양한 식물과 연못이 조화를 이룬 정원이야말로 알함브라의 별미임에 틀림없다.

나스로 궁전은 메수아르 궁, 코마레스 궁, 라이온 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코마레스 궁이다.

여름별장 헤네랄리페는 물의 궁전이라는 별침을 가지고 있을 만큼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눈 녹은 물을 이용한 많은 분수와 물줄기로 여름을 시원하게 해 준다.

2시간 30분에 걸친 알함브라 궁전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런 궁전은 내 생애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 정말 세상을 넓고 볼 것은 많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여기까지 안내함으로써 박영숙 가이드의 임무는 끝났다고 한다. 구수한 부산사투리가 정겨웠는데 헤어져서 많이 아쉽다. 스페인에의 삶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2시간쯤 달려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대형 간판에 'La Parada'라고 적힌 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쌀밥이 나왔지만 안남미라 모래알 같아서 먹기가 영 거북하다. 그래도 김과 멸치, 고추장에 버물어 조금 먹었다. 치즈와 햄도 우리 것과 맛이 달라서 하나씩 맛만 보고 말았다. 오징어와 먹물을 조합한 스프는 느끼해서 맛을 보기도 싫었고 오렌지는 껍질을 벗겨서 절반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발렌시아로 출발했다. 3시간 40분이나 소요되었다. 중간 휴게소에 들렀을 때 스타우트 맥주를 한 병 사서 맛을 보았는데 원래 맥주는 내 취향이 아니어서 일반 맥주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잘 모르겠다.

발렌시아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 이어 스페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발렌시아주의 주도이다. 유럽에서도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이지만 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가 발렌시아 출신의 건축가 산티아노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대규모의 미래형 예술 과학 단지가 들어서면서 과거, 현재, 미래를 복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관광 산업 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광활한 농경지에서 지중해의 바람을 맞으며 재배된 오렌지와 올리브가 유명하여 세계로 수출되고 자연스럽게 무역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MAS CAMARENA HOTEL에 도착하여 104호를 배정받았다. 이 호텔이 여태까지 묵었던 숙소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늑한 것 같다. 가방을 들여놓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저녁식사 메뉴는 생선튀김에 감자와 빵, 그리고 스파게티가 나왔다. 국수는 좋아하지만 케찹에 버무린 스파게티는 도저히...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은 잘 먹네. 내가 문제로구나.

 

호텔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시 외곽이라 볼 것도 없어서 그냥 숙소로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벽 마감으로 종이벽지를 발라놓았네. 벽지를 사용한 호텔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또 욕조도 설치되어 있어서 오랜만에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목욕을 하고 소주 한잔 마시면서 지나온 여행을 음미해 보았다. 벌써 절반이 넘었구나. 귀국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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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일정에 여유가 있는지 30분 늦게 모닝콜이 들어왔다. 잠을 푹 잤기 때문인지 그다지 피곤한줄 모르겠다.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납작하게 눌려진 것 같은 복숭아가 있었다. 이런 복숭아는 처음 보는데... 여기서만 생산되는 복숭아인가? 맛은 별로다. 복숭아는 껍질이 살살 벗겨지며 단맛이 듬뿍 배인 연한 복숭아를 좋아하는데~~ 빵 두 조각과 복숭아통조림에 파인주스를 한 잔 마시고 나왔다.

 

바르셀로나 근교의 아찔한 절벽의 도시 몬세라트로 갔다. 도중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스페인의 휴게소 시설은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 고속도로인지 일반 국도인지 모르겠지만 매장도 넓고 다양한 상품을 진열해 놓고 있다. 이번에도 스타우트 한 병을 사서 홀짝 마셨다. 그런데 가격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어제는 한 병에 4였지만 오늘은 2.8. 품질이 달랐나?

 

4시간 20분을 달려서 몬세라트 시내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현지 가이드 안병옥님을 만났다. 나이가 60은 넘게 보이는 할머니다. 서울 말씨인데 말이 어떻게나 빠른지 내가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더구나 한 번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바람에 남은 일정이 영 별로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박영숙 가이드에게 왜 계속하지 않고 중간에 바뀌느냐? 당신의 의지냐, 아니면 회사의 방침이냐고 물었더니 바르셀로나에도 전담 가이드가 있고, 또 가이드끼리 공생하기 위하여...’라는 약간 애매한 대답을 들은 바 있다.

 

점심 식사하러 현지인 식당으로 갔다. 테이블에 와인이 한 병씩 놓여있었던 것이 가장 반가웠다. 마실 사람만 한 잔씩 마시고 나머지는 빈 병에 가득 따라서 작은 가방에 담았다.ㅎㅎ

빵과 야채샐러드, 삼겹살 비슷한 돼지고기와 감자튀김이 나왔다. 역시 절반이상 남기고 나왔다. 내가 이정도만 먹고도 활동하는데 별 지장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앞으로 하루 두 끼만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먼저 나와서 식당 앞 도로를 조금 걸었다. 그런데 이곳 승용차가 우리와 다른 부분이 눈에 띄었다. 전면유리에 부착된 윈도우 브러시가 좌우의 크기가 지나치게 달랐다. 우리는 운전석이 60cm, 조수석이 45cm 정도인데 여기는 운전석은 70cm, 조수석은 30cm쯤 되었다. 와이퍼 설치지점이 완전히 한쪽에 몰려있는 것이 특이했다. 어느 쪽이 운전하는데 편리할지 잘 모르겠다.

 

기이한 형태의 회백색 바위산 톱으로 자른 산이라는 이름의 몬세라트로 출발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멀리서 보이는 산은 정말 특이하게 생겼다. 언뜻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해발 4,095m인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산이 떠오르지만 그 산과 비교도 안 되게 톱니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많다. , 어떻게 이런 바위산이 존재할 수가 있을까?? 30여분 달린 다음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산으로 올라갔다. 해발 730m에 지어진 수도원이 있는 산중턱까지 케이블카를 탄 시간은 불과 6,7분 정도 걸렸을까. 가까이서 보는 산의 모습은 너무 엄청나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등산을 좋아하여 우리나라 방방곡곡 명산을 돌아다녔지만 이와 비슷한 산은 없다. 중국의 화산도 엄청난 규모의 화강암 덩어리이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장대한 바위산에 비할 바 못된다. 수도원 보러왔다가 이런 괴상한 산을 보게 될 줄이야!!! 이번 스페인 관광의 특별 보너스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런 산중턱에 대규모의 수도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 흥미로웠다.

 

안병옥 가이드를 따라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제법 높은 계단을 지나 아치형 구조물을 통과하여 들어가자 산타 조지 조각상이 좌측벽면에 설치되어 있다. 성 가족 성당 서쪽 파사드인 예술의 수난을 설계한 수비락스에 의해 조각된 조각상이다. 얼굴을 음각으로 조각하면 어느 방향에서 보던지 보는 사람과 눈동자가 마주치게 된다. 이런 음각 얼굴은 뉴질랜드의 퍼즐링 월드에서 한 번 보았다. 벽면에 음각으로 유명인사 얼굴을 수십 개 만들어 놓았는데 쳐다보는 방향에 따라 조각 얼굴의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치는 것이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여기서도 그런 음각 조각상을 만날 수 있었다.

 

수도원 앞마당에는 흰색의 굵은 철사로 그물처럼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 놓았다. 이 자리에 예술작품을 일정기간 전시했다가 철수한다고 한다.

수도원 정면에는 예수님 12제자의 동상을 만들어 놓았다. 원래는 은으로 세공된 파사드였지만 1900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재건되었다고 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는 사람들이 긴 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2층에 모신 검은 성모상을 알현하기 위한 줄이라고 한다. 30여분을 기다려야 가까이 가서 접견할 수 있다는 바람에 줄을 서는 것은 포기했다. 검은 성모상은 유리로 보호되고 있지만 오른손에 들고 있는 공은 개방되어 있어 이 공을 만지고 기도하면 성모님이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성모상은 특이하게도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전해지는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이다. 성 루카에 의해 만들어지고 50년 성 베드로에 의해 몬세라트로 옮겨져 왔다고 한다. 아랍인들에게 강탈당하거나 파괴될 것을 우려해 동굴 안에 숨겨 두었는데, 880년 목동들이 밝은 빛과 함께 천상의 음악이 들려 빛이 있는 쪽을 따라가니 동굴 안에 이 검은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목동들은 너무 놀라 이 사실을 가까운 곳에 거주하던 만레사 주교에게 알렸고 주교가 검은 성모상을 옮기려 하자 꼼짝도 하지 않자, 성모상이 있어야 할 곳은 이 자리인 것 같다며, 이곳에 작은 성당을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도원은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아도 화려함은 여느 대성당 못지않다.

9세기에 처음 알려진 몬세라트 수도원은 이후 증개축 되었지만 1811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상당한 부분이 파손되었고 수도사들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야 다시 재건에 들어가고 수도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 들어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지금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약 80여 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바실리카 대성당에서는 13세기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소년 성가대이자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손꼽히는 에스콜라니아와 카탈루냐의 성인인 검은 성모상을 만날 수 있다. 토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두 차례씩 천상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세계 3대 소년합창단 중 하나인 몬세라트 소년합창단이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 합창단은 수도원과 성당에서만 공연하고 있는데, 15001의 경쟁률을 통과한 9~11세의 소년만이 이 합창단의 단원이 될 수 있다.

 

자연과 신앙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산 전체가 거대한 수도원처럼 보이는 몬세라트는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가 자주 들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몬세라트 기암괴석의 자연미 넘치는 곡선은 가우디 건축세계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고,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1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건너편 산중턱에 있는 십자가를 보러갔다. 콘크리트 포장길로 되어있고 중간 중간 인물 동상도 세워놓았다. 철문으로 막아놓았기에 웬일인가 했더니 우회하는 길을 바로 옆에 만들어 놓았다. 차량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나 보다. 20분쯤 걸어서 십자가에 도착했다. 주철로 만들어진 십자가는 높이가 7~8m정도로 되어 보인다. 십자가에는 신도들이 상납한 묵주, 타월, 꽃다발 등이 걸려있었다.

여기에 서니까 사방이 탁 트여서 가슴이 뻥 뚫린 듯 너무 시원하였고, 수도원과 뒤에 있는 몬세라트 바위산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잘 보인다. 십자가를 세운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 자리도 명당자리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큰 바위에서는 강력한 자기장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기가 세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몬세라트 바위산 아래는 이런 수도원이 들어서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도 거대바위 밑에는 거의 대부분 사찰이나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버스정유소 부근에 제법 큰 광장이 있었는데 작은 공원처럼 꾸며놓았다. 직육면체 돌을 나선형 계단처럼 포갠 조형물이 눈에 띈다. 무게중심을 잘 잡아서 멋지게 만들어 놓았구나. 아랫부분의 작은 공터에서 수도원 앞 대형 상가건물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 정말 아찔하다. 기암괴석을 기초로 사용하여 콘크리트 기둥을 세워서 건물을 지었는데, 이런 자리에 건물을 설계한 건축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대담한 상상력이라 칭찬해야 할지, 무모한 시도라고 혹평해야 할지 구분이 안 된다. 폭이 100m는 넘을 것 같은 3층 규모의 긴 빌딩이 아슬아슬하게 바위에 얹혀있었다.

 

구경을 다 마치고 내려갈 때는 열차를 탔다. 열차 궤도 중간에 톱니바퀴 궤도가 하나 더 설치되어 있다. 스위스 융프라우 오를 탔던 기차도 이런 톱니바퀴 궤도가 있었지. 열차는 깨끗하게 청소가 잘 되어 있었고, 좌석도 쿠션도 없는 강화플라스틱 재질이다. 화재에 대비한 조치이리라. 차장으로 보이는 경치도 대단하다. 몬세라트 수도원 관람이 주목적이었지만 내게는 이 산이 주는 강력한 이미지가 더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바르셀로나 해변의 그럴듯하게 꾸며진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오늘 메뉴는 야채샐러드는 어디가나 기본으로 차려지고 닭고기와 감자튀김, 빵이 나왔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한 그릇씩 나와서 잘 먹었다. 현지식 치고는 가장 먹을 만 했다.

넓은 백사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배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냥 일광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모래 속에 파묻혀 얼굴만 내놓은 사람도 있고... 모두 행복하게 보인다.

 

1시간쯤 달려서 HOTEL MAR BLAU에 도착했다. 여기는 거의 시내 중심가인 것 같다. 호텔 바로 앞에 대형 슈퍼마켓이 있어서 쇼핑하기 좋았다. 배정받은 430호에 가방을 들여놓고 슈퍼에 갔다. 우리나라의 홈플러스에 못지않은 시설을 하고 있어서 없는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여기서 초콜릿을 12개와 흑맥주 6병들이 한 박스를 샀다. 초콜릿은 집에 가져가서 나누어먹기 좋다. 그런데 흑맥주 6병이 4.25라고 한다. 어떻게 된 일이지? 휴게소에서는 1병에 2.8였잖아.

숙소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괜찮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고 건물마다 불이 켜지니 더욱 볼만하구나. 앞에 있는 Bar에서는 요란한 음악소리도 들리지만 시끄럽게 느껴지지는 않구나. 호텔의 풀장에도 그림처럼 조명이 환하다. 그렇지만 아직 그렇게 무더운 날씨는 아니어서 물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욕조에 물을 받아서 시원하게 목욕을 했다. 미스트롯 정다경의 가슴 아프게를 들으며 스페인의 밤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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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30분 늦게 모닝콜이 들어왔다. 일어나서 어정거리다가 7시 반에 식당으로 내려갔다.

숙소가 마음에 드는 호텔은 식당도 괜찮다. 다양한 먹거리가 구비되어서 입맛을 돋운다. 오늘은 도너츠도 있네. 빵을 요플레에 찍어 계란후라이와 같이 먹었다.

오늘 밤도 이 호텔에서 묵기 때문에 큰 가방은 그대로 두면 되고 백팩에 필요한 것들만 챙겨서 로비로 내려갔다. 9시 반에 시내로 출발했다.

 

오늘은 스페인이 나은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만나는 날이다. 대학교에서 가우디에 대하여 배우기는 했지만 서양건축사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지라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가끔 매스컴을 통해서 가우디라는 이름은 들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아는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건축에 대한 나의 개념이 완전히 흐트러지는 날이 되고 말았다~~

시내로 가서 스페인의 작품인 카사밀라카사바트요를 구경했다.

 

카사밀라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팬이었던 페드로 밀라 이캄프스가 카사 바트요를 보고 의뢰한 연립 주택으로, ‘카사 밀라(밀라의 집)’라는 이름보다 라 페드 레라(채석장)’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거대한 돌덩이처럼 생긴 건물의 외관에서 가우디가 추구하는 곡선과 자연에 가까운 디자인이 한눈에 느껴진다. 바다의 물결을 연상하게 하는 곡선의 외관과 미역 줄기를 닮은 철제 발코니는 주변 건축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르셀로나 시민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다. 옥상은 투구를 쓰고 있는 로마 병사와 타일로 만든 십자가, 독특한 디자인의 굴뚝이 인상적이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르셀로나의 풍경도 특별함이 느껴진다. 아래층에는 가우디의 작품들과 가우디에 관한 영상들을 관람할 수 있는 전시관이 있으며, 그 아래층에는 당시 생활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어 매우 흥미롭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재된 건축물이다.

 

카사바트요는 그라시아 거리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로, 바다를 연상시키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외관은 단연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카사 바트요는 바르셀로나의 사업가였던 바트요가 의뢰해 설계한 것으로 1905년부터 약 3년간 지어졌다. 카사 바트요의 외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해골 모양의 테라스와 뼈를 형상화한 기둥이다. 그래서 인체의 집이라는 의미로 카사 델스 오소스(Casa dels ossos)라고도 한다. 가우디의 특징인 곡선 구조는 실내에서도 확실히 드러나며, 반투명한 유리를 통해서 푸른빛이 비쳐 마치 물속처럼 보이는 효과를 표현한 엘리베이터도 카사 바트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이다. 현재는 글로벌 캔디 브랜드 추파춥스 회사의 소유이며, 가우디 탄생 150년 기념으로 2002년부터 바르셀로나 시와 함께 일반인에게 개방하기 시작했다. 200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건축을 구상할 수 있을까? 내가 배운 건축은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수직과 수평이 공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어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건축에 곡선이 들어가면 시공비는 최소 20%는 더 든다고 보면 된다. 가우디는 경제성은 완전히 무시하고 오로지 미적관점만 고려한 것 같다. 어쩌면 타당성 있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돈이 얼마나 드는지 그것은 건축주가 판단할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는 건축가로써의 천재성을 작품에 반영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 판단이었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지 않았을까. 경제성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그런 건축물은 탄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라시아 거리의 가로등도 디자인이 이채롭다. 가로등 아래에 설치된 타일로 된 벤치도 특이한 형태다. 이 거리를 만사나 데 라 디스코르디아(Manzana de la Discordia, 불화의 만사나)’라고도 불렀다. 불화의 만사나에서는 가우디의 작품 외에 돋보이는 건축물은 조세프 푸이그 이 카다팔치(Josep Puig i Cadafalch)의 카사 아마트예르(Casa Amatller), 루이스 도메넥 이 몬타네르(Lluís Domènech i Montaner)의 카사 예오 모레라(Casa Lleó Morera)가 있다. 현대적 감각을 살린 특색 있는 건물들도 엄청 많았다.

 

콜럼버스의 탑을 보러 갔다. 포트 벨은 람블라스 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항구이다. 이곳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돌아온 항구로, 당시 이사벨 여왕이 돌아오는 콜럼버스를 마중하러 나왔던 이곳에는 현재 60m높이의 콜럼버스의 탑이 세워져 있다. 파도가 치는 모양을 형상화한 갑판 다리는 바다의 람블라(Rambla de Mar)’라 불리는데, 이 다리가 람블라스 거리의 연장선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리가 끝나는 곳에 위치한 마레 마그넘은 바르셀로나에서 유일하게 일요일에도 오픈하는 쇼핑센터로, 외벽이 거울로 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색다른 추억이 된다. 포트 벨 한쪽에는 부유층의 요트들이 정박해 있으며,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배는 콜럼버스가 첫 항해 때 탔던 산타 마리아호를 복원한 것이다.

 

마레 마그넘건물 왼쪽 끝에 위치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메뉴는 해물볶음밥 비슷한 것으로 홍합과 새우도 몇 마리 들어있었다. 맛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의 혐오스러운 맛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내 입맛에 맞는 것은 어릴 때부터 먹던 우리음식뿐이다. 반쯤 먹고 나왔다.

 

바르셀로나 중심무대인 카탈루냐 광장으로 갔다. 안병옥 가이드는 주변을 대강 설명 하고나서 두 시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가장 번화한 시내 중심가이지만 우리나라처럼 하늘로 수십 층 올라간 건물은 없고 대부분 10층 이하의 나지막한 건물들이다. 나는 람브라스 거리를 걷기로 했다.

바닥에 깐 보도블록이 물결치듯 일렁거린다. 평평한 블록이 아니라 표면을 곡선으로 가공한 것 같다. 마치 파도가 넘실대는 것 같아서 보기가 좋았다. 행위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금빛분말로 온 몸을 감싼 동상 옆에 앉았다가 갑자기 살아서 꿈틀거리는 바람에 완전 식겁했다. 동상이 아니라 행위 예술가였던 것이다. 이런 사람의 사진을 찍으면 돈을 줘야 한단다. 온갖 기념품과 꽃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관광객이 워낙 많으니까 저렇게 많은 가게도 장사가 되나보다. 나도 'FC BARCELONA'로고와 글자가 수놓인 20cm x 140 cm크기의 머플러를 하나 샀다. 집에 걸어놓고 평생 감상해야지~~

중간쯤 가니까 대형 재래시장이 나타났다. 여기가 산 호셉 시장(보케리아 시장)인가보다. 들어가 보니 고기, 생선, 과일, 과자, 각종 기름 등등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고 없는 것이 없다. 차를 한 잔 마시려고 하다가 나 혼자라 그냥 나왔다.

예술가의 거리답게 화가들이 앉아서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캐릭터화하여 특색 있는 그림도 그려주는 것이다. 한참을 서서 구경하였다. 이 길 끝나는 곳에 아까 보았던 콜럼버스의 탑이 있었다. 아하, 그래서 점심식사 전에 가보았던 다리가 바다의 람블라(람블라스 거리의 연장선)’이라는 뜻으로 불리는구나.

 

카탈루냐 광장으로 돌아와서 버스에 올랐다. 30분 정도 달려서 구엘공원으로 갔다.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엘공원은 가우디의 상상력과 창의적인 세계, 자연과 인간을 배려한 마음이 가득 담긴 곳이다. 이곳은 본래 가우디의 경제적 후원자인 구엘이 영국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대규모 주택단지를 짓기 위해 가우디에게 의뢰하여 설계된 곳이다. 구엘과 가우디는 이곳에 고급 주택 60호 이상을 지어 부유층에게 분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돌도 많고 경사진 비탈길이어서 작업을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결국 지형적 한계와 자금난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4년이라는 긴 공사 기간에도 불구하고 단지 몇 개의 건물과 커다란 광장, 예술작품 같은 벤치 정도만 남긴 채 야심찬 프로젝트는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구엘 사후 1922년 바르셀로나 시가 이 땅을 사들여 다음해 시영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가우디와 구엘의 이상 주택이라는 본래의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이곳은 가우디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 시민과 관광객들은 예술작품 같은 공원이 주는 무한한 감동을 선물 받게 되었다. '하마터면 이 아름다운 곳을 모두와 함께 나누지 못할 뻔했다니' 주택 건설의 실패가 너무도 감사하게 느껴진다.

과연 이런 디자인을 가우디 외에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철저하게 직선을 없애고 곡선만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받는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계획한 인공미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대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색과 곡선의 아름다운 건물들, 화려하고 신비한 모자이크 장식의 타일, 땅을 고르는 것도 반대한 만큼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길과 인공 석굴 등 어느 것 하나 가우디답지 않은 것이 없다. 인공석굴 천정에는 돌이 삐쭉 빠져나와서 조금만 있으면 떨어질 것 같다. 기둥도 표면이 거친 돌을 아무렇게나 붙여놓은 것 같다. 마치 은밀한 언덕 위에 만들어진 초현실 영화의 세트장처럼 멋지고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정말이지 영화 속에서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야자수 같은 나무와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타일벤치가 장관을 이루는 광장은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하나 타일을 붙여 만든 벤치는 같은 패턴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계획성 있게 색의 조화를 고려해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비둘기가 있는 광장 중앙을 뛰어다니고 벤치의 모양을 따라 걷는 등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 곁에서 즐거운 시간을 만끽한다.

 

이런 동화의 세계를 뒤로 하고 가우디의 평생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으로 갔다. 가이드가 미리 예약한 입장권에는 성당 안으로 입장할 시간이 적혀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이런 장치가 필요하였나보다. 가우디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건축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일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이미지에는 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이 포함되기 마련인데, 그 규모가 워낙 크고 계획도 현대 건축물답지 않게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1-2년이면 건물을 뚝딱짓고 삼십 년 된 아파트는 당연히 헐어 버려야 마땅한 퇴물 취급을 하는 우리의 풍토와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유럽의 성당 중에는 짓는 데 몇 백 년이 걸린 곳이 허다한데, 역사 속의 사건이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외관도 물론 어마어마하지만 성당 내부도 그 화려함에 있어서 여태껏 보았던 대성당들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거대한 기둥이 분위기를 압도하였고 수천 개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신비로움을 더했다. 거대한 철문에는 한글도 보였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세계 각국의 언어로 가장 중요한 구절을 새겼나보다.

1883, 한 독실한 가톨릭 단체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신자들의 모금으로 가우디에게 성당 건축을 맡겼다. 한 해 전에 다른 건축가가 처음 설계를 시작했던 것을 이어받았는데, 이 작업은 가우디가 192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후에는 다른 건축가들이 넘겨받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의뢰 받은 다른 일과 함께 진행해 오다가 1914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만 매달렸으며, 심지어 성당 옆에 숙소를 만들고 그곳에서 일하며 살기까지 했다. 가우디는 본인이 살아 있을 때 성당 건축이 마무리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성당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 않다. 난 늙을 테지만 내 뒤를 다른 사람들이 이어갈 것이다. 작품의 정신은 항상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작품과 함께 살아가는 세대의 것이다.”

1926, 그는 전차에 치여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3일 후에 사망했다. 그가 눈을 감은 병원은 루이스 도메넥 이 몬타네르라는 또 다른 모데르니스모 건축가가 설계한 산타 크레우 이 산트 파우 병원(Hospital de la Santa Creu i Sant Pau)이었다. 이곳은 가우디가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다. 그의 유해는 성당 안에 묻혔으며 병원에서 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그의 이름이 붙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 도착하면 누구나 높이 솟은 탑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직육면체도 원통형도 아니고, 꼭짓점이 뾰족하지도 않은, 타원형을 아주 길게 늘여 놓은 것 같은 탑이다. 예수의 열두 사도들에게 봉헌되는 열두 개, 복음서 저자들을 위한 네 개,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씩 해서 모두 열여덟 개의 탑이 지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건물의 동쪽, 그러니까 연못이 있는 공원 쪽에 가까운 곳이 가장 먼저 지어 올리기 시작한 예수 탄생파사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오는 수태고지 장면, 예수 탄생 장면, 동방박사와 목동이 경배하러 오는 장면 등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 파사드 위의 탑 네 개 중 우리가 보기에 가장 왼쪽에 있는 탑이 성 베르나베(사도행전의 바르나바)에게 봉헌된 탑인데, 가우디가 살아 있을 때 유일하게 완성된 탑이라고 하며 높이는 100미터에 이른다.

성당의 서쪽은 예수 수난파사드다. 예수의 수난 장면을 재현해 낸 사람은 조세프 마리아 수비락스(Josep Maria Subirachs)라는 바르셀로나 출신의 조각가로, 1987년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작업을 맡았다. 예수의 수난, 고통, 죽음, 희생이라는 주제를 다룬 조각은 서쪽 하늘에서 해가 질 때 점점 어두워지는 풍경과 드라마틱하게 어울린다.

가우디는 고딕 양식의 라틴 십자가형 플랜(한쪽이 나머지 셋보다 긴 십자가 모양의 도면)에서 시작하여 기하학적인 형태와 자연의 모티프를 사용해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성당을 설계했다. 가우디가 1926년에 사망한 뒤, 1930년에 예수 탄생파사드와 종탑이 완성되었다. 스페인 내전 중에 가우디의 작업실에 화재가 일어나 설계도와 각종 사진, 자료 등이 불탔으나 그의 아이디어는 계속 이어졌고, 내전이 끝난 1939년 이후에는 속도는 느리지만 공사가 재개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사에 사용된 기술도 현대의 기술로 바뀌었다. 시멘트도 활용하지만 가우디 특유의 모자이크(트렌카디스(trencadÍs) 기법이라고 한다. 색유리나 도자기 등을 깨뜨린 후 붙이는 방식으로, 곡면에 모자이크를 제작하기가 좋다) 제작 방식은 계속 이어진다. 2010년에는 성당의 내부가 완성되어 교황 베네딕토 16(Benedictus XVI)가 집전하는 봉헌 미사가 거행되었다. 성당 내부의 기둥은 마치 키가 큰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가 사망한 지 백 년 되는 해인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1990년대에 이곳을 처음 봤을 때는 과연 그때가 오기는 하는 것일까 싶었는데 십 년 조금 넘게 기다리면 완성된 성당을 볼 수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설은 정부 또는 공식 교회 지원하지 않는다. 개인 후원자들은 초기 단계에 자금을 지원했다. 관광객들이 구매한 티켓의 돈은 공사비 지불에 사용되며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대해서는 후원자들을 통해 사적인 기부가 허용된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여섯 개의 다른 가우디 건물과 함께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 된 이유로는 건축 및 건축 기술 개발에 대한 가우디의 독창적인 공헌’, ‘카탈로니아의 엘 모더니즘을 대표예상된 20세기 현대 건설의 발전과 관련된 형태와 기술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침등이 있다.

가우디의 작품을 보고나서 그 천재성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정말이지 커다란 행복이다. , 정말 세상은 넓고 볼 것은 많구나.

 

저녁식사는 가야금식당에서 닭도리탕을 먹었다. 김치찌개, 질금나물, 오이무침 등 오랜만에 만나는 우리음식이었지만 이 식당의 주방장은 완전 수준이하다. 이런 맛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울 텐데... 세비야의 문식당에서 먹었던 맛있는 미역국 정도는 되리라 예상했지만 너무 엉터리 맛이어서 많이 실망했다. 공기밥만 한 그릇 얼렁뚱땅 먹고 나왔다.

 

휴대폰 만보계를 보니 19,200보나 된다. 종일 제법 많이 걸었지만 가우디의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너무 흥분했는지 생각보다 피곤하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흑맥주를 한 병 마시며 오늘 일정을 되돌아보며 가우디라는 천재 건축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나는 건축은 당연히 경제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길게 보면 경제적으로도 아주 성공한 케이스다. 건물이 준공되기도 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입장료만으로 공사비를 충당한다고 하지 않는가. 앞으로 대대손손 얼마나 많은 외화를 획득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 구엘공원을 매입한 바르셀로나시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한 사람의 위대한 건축가의 역할이 이런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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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30분 늦게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 일정이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나보다. 오늘도 930분에 버스에 올랐다. 안병옥 가이드의 얘기를 정리해 보면

* 스페인어와 카탈로니아어를 사용

* 8월 한 달의 휴가를 위하여 11개월을 근무한다고 말할 정도로 휴가기간은 엄수

* 겨울 평균기온이 11, 눈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스키는 피레네 산맥으로 가야 가능

* 카탈로니아에는 500명 정도의 한국인이 거주. 태권도 사범이 이곳 이민사의 주역

* 바르셀로나에는 10명중 8명이 관광객, 1명은 현지주민, 1명은 소매치기(?) ㅎㅎ

 

1시간 정도 달려서 토사 데마르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해변에 있는 토사 데마르성까지 도로를 따라 15분 정도 걸었나보다. 백사장은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은 제법 많았다.

오른편에 오래된 성채가 있어서 그곳으로 올라갔다. 성에서 내려다보는 백사장의 모습은 한 편의 그림이다. 해변의 건물들은 대부분 5층 이하로 지었다. 이렇게 나지막하게 지으니 뒤에 있는 산이 더욱 푸르고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관광객을 위한 소형버스가 운행되고 있었지만 등대가 설치된 정상까지 1km도 안 되는데 버스를 탈 필요는 없지. 구경하면서 걸어가는 것이 훨씬 좋았다.

오랜만에 수평선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만나는 장면을 카메라에 많이 담았다. 가장 보기 좋은 사진을 골라 내 컴퓨터의 바탕화면에 깔았다.

백사장 반대편에는 깎아지른 절벽위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정말 보기 좋은 모습이다. 내려가면서 보니까 옛날에 사용하던 대포도 설치해 놓았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유람선이 사람을 가득 싣고 백사장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배가 닿으려면 선착장이 있어야 하는데 어떤 형태의 선착장도 없는데 배는 해변으로 가고 있고.... 정말 이상해서 지켜보았더니 백사장 3m 전방에 배가 멈추더니 사다리를 펼치는 것이 아닌가. , 여기는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별로 없고, 백사장 끝에서는 급경사를 이루기 때문에 배가 정지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백사장 입구에 승선권 판매부스가 설치되어 영업을 하고 있었다. 기암괴석 사이로 작은 배가 드나드는 사진이 여러 장 걸려있었다.

모래 굵기가 3mm정도는 될 것 같다. 모래가 아니라 거의 자갈수준이네. 곳곳에 샤워시설이 있어서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넉넉하고 한적한 풍경이다.

 

1시간쯤 이동하여 지로나에 도착했다. 바르셀로나의 유대인 마을이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오냐르 강을 중심으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구분된다. 지로나 대성당은 구시가지에 있다. 철제로 된 다리를 건너 지로나대성당을 보러갔다.

대성당은 9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들어갈 수 있다. 성당내부 구경은 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외관만 구경했다. 정면 파사드는 이 지역 특유의 카탈루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고 성당 내부는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독특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파사드 가운데에 성모자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사도 베드로, 오른쪽에 사도 바오로 입상이 있다.

 

유대인 골목을 걸었다. 중세의 숨결이 담긴 골목문화가 살아있는 곳이다. 마을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과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좁은 골목길을 가다 보면 마치 천년 세월을 되돌려 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소박하지만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러운 맛을 간직한 작은 도시다.

그런데 발코니 등 외벽에는 세월호를 연상케 하는 노란리본이 많이 걸려있었다. 내막을 알아보니 바르셀로나가 속해있는 카탈루니아주는 20세기 초부터 카탈루니아 독립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2014년 독립 여부를 결정하는 주민 투표를 하였는데 투표 결과 81%의 찬성을 이끌어냈으나, 스페인 정부는 이를 승인을 받지 않은 불법적 선거라 규정하였다. 2017년 국민투표에서는 찬성률이 91.96%에 이르렀고 카탈루니아 주정부는 20171027일 독립선언을 통해 카탈루니아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독립 선언을 무효로 하면서 주지사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주지사는 벨기에로 탈출하여 망명을 하였고, 카탈루니아 주민들은 무사히 돌아오라는 기원으로 노란리본을 벽에 걸어서 정부에 항의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월호의 노란리본이 여기까지 수출(?) 되었다는 말인가?

붉은 철제다리를 통해 오냐르 강을 건넜다. 이 다리는 에펠다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파리의 에펠탑을 만든 에펠이 1877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에펠탑(1889) 보다 먼저 만들었다.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상해라는 간판이 붙은 중국식당에서 했다. 실내에는 벽과 천정에 커다란 용을 붙여놓았고 온통 붉은색으로 치장을 하여 중국식당임을 강조했다. 중국 고유의 묽은 스프는 먹을 만했지만 나머지 다른 음식들은 여전히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스프만 두 그릇 먹고 나왔다.

 

여기서 안병옥 가이드와 작별을 하고 바르셀로나공항으로 갔다. 이스탄불로 가는 사람들이 제법 긴 줄을 이루고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좌석표를 받고 수화물을 부쳤다. 정말 살만한 세상이다. 여권만 제출하면 모든 것이 한 번에 해결되잖아. 19시 이륙하는 비행기라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eye shopping도 귀찮다. 출국장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4시간을 비행하여 도착한 이스탄불 공항에서도 환승수속을 다 밟아도 두 시간이나 대기를 해야 했다. 이스탄불 공항 면세점이 워낙 넓다. 이런 저런 구경하다가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조그만 양주병을 보았다. 50ml 두 병에 남았던 동전 5.5를 지불했다.

현지시간 새벽 140분에 이륙한 TK90 비행기는 9시간 20분을 날아서 무사히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수화물을 찾고 나서 가이드와 함께 여행했던 사람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창원행 리무진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밤 12시가 넘었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부분은 포르투갈 파티마성당을 방문한 것과 톱으로 자른 산몬테라트를 구경한 것이리라. 몬테라트 바위산의 위용은 사진으로 봐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언젠가 더 웅장한 바위산을 구경할 기회가 있겠지만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 중국의 태항산, 화산과 더불어 내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산이다.

파티마는 내가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2006년 이미선과 같이 세례를 받고 4,5년 성당에 다녔지만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나에게는 괜히 부담스러웠다. 냉담기간이 9년쯤 된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 종교를 하나 선택하는 것도 노년을 즐겁게 보내는 방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파티마의 기적을 알게 되었고 파티마 성당을 구경할 기회를 가진 것을 그냥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다시 성당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이미선이 정말 반겨주었다. 기다리면 언젠가 돌아올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이미선에게 내가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고나 할까. ㅎㅎㅎ